나의 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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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이 들끓는 시대에 평온한 마음을 유지하며 살아가기란 쉽지 않다. 남들은 저만치 달려가는데 나만 여기서 주저앉아 있는 것은 아닌지 초조해질 때면 ‘꿔보’를 돌아보자. ‘꿔보의 도’란 무릇 남에게 신경을 끄고, 나 자신에게도 신경을 끄고, 열심히 일하되 힘들면 때려치우고, 죽지 않을 만큼만 돈을 쓰고, 가공의 맛을 멀리하는 것. 남과 비교하지 않고 나를 지키는 간소한 먹거리 생활을 꾸려간다면 어느새 자기혐오는 옅어지고 알고 보면 모두가 자신만의 꿔보 라이프를 실천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공공도서관에서 글 쓰고 그림을 그리며 방구석에서 최저가를 검색해 장을 보는 만화가는 오늘도 성실하게 꿔보의 삶을 실천하고 있다. 언제고 다시 솟아오를 그날을 묵묵히 기다리며.
작가정보
구석에서 글을 쓰고 만화를 그립니다. 어릴 적부터 만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선뜻 용기를 내지 못하고 방황하다 어영부영 고시촌에 흘러들어 갔습니다. 큰 점수 차로 연거푸 시험에 낙방하고 고시촌을 떠나 방송국과 사교육 업계를 전전한 끝에 인터넷 폐인이 되었습니다. 블로그 및 익명게시판 곳곳에 뻘글과 낙서를 올리며 현실 도피를 하던 중 불현듯, 진지하게 만화를 그리고 싶어졌습니다. 언젠가는 정말로 진짜 멋진 만화를 그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오늘도 어딘가의 구석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먹을 것을 생각하면서요. 『먹는 존재』 시리즈와 『족하』 〈홍녀〉를 그렸습니다.
목차
- 시작
꿔보 테스트
채소
콩
계란
우유
견과류
아보카도
고구마
밥과 김치
빵
고기
술
끝, 다시 시작
책 속으로
꿔보의 기준은 원시인입니다. 원시인이라면 어떻게 먹을까를 떠올리면 대체로 꿔보 사상과 일치하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불의 발견 이전에는 생풀을 그냥 뜯어 먹었겠지요. 다만 현대의 채소에는 당시에는 없었을 유해 화학 성분이 표면에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잘 씻어 먹습니다.
_29~30쪽 「채소」에서
콩 맛은 잘 모르면서 쇠고기가 값비싸고 맛 좋다는 인식은 이미 갖추고 있었던 어린 시절의 저는, 저 말에 콩이 진짜로 쇠고기인 줄 알고 그날따라 유난히 딱딱하게 조려진 콩자반을 호쾌하게 한 숟갈 떠먹었습니다. 그리고 절규했죠. “씨발!!!” 그때부터였을 겁니다, 콩에게 격한 배신감을 가지게 된 게.
_40~41쪽 「콩」에서
먹으면 내 몸과 마음까지 완전해지는 듯한 음식. 하지만 의학·과학·식품 공학의 발달로 특정 물질의 완전무결함을 주장하기 어려워져서인지 요즘에는 진지하게 언급하는 이가 드물어진 그것. 1년에 한 번 생각할까 말까 한 그 단어, 완전식품. 꿔보 라이프를 지향한 뒤부터 부쩍 자주 생각합니다.
_71쪽 「우유」에서
꿔보 식단에서 유지방이 빠져나간 빈자리를, 이제는 견과류가 든든히 채워주고 있습니다.
거짓말입니다. 솔직히 견과류가 든든한 줄 모르겠어요. 흔히 견과류는 조금만 먹어도 포만감이 느껴지기 때문에 다이어트에 도움이 된다고 하지만 저는 아닌 것 같습니다.
_97쪽 「견과류」에서
정말 아보카도만 보면 이상하게 공들여 촬영하고 싶어집니다. 풋풋한 연두색과 따뜻한 병아리 색 물감을 한데 짜서 부드럽게 섞은 듯한 과육과 가운데에 육중하게 자리 잡은 흑갈색 씨앗의 그 회화적인 색감 앞에서는, 없던 예술혼도 어떻게든 긁어모아 불태우게 됩니다. 가히 식물성 지방계의 독보적인 마성의 힙스터 뮤즈라 할 만합니다.
_106쪽 「아보카도」에서
그래서 아보카도가 그렇게나 맛있냐고 묻는다면, 말문이 턱 막힙니다. 모르겠어요. 솔직히 말해서 이게 이렇게 인기가 있을 일인지 먹을 때마다 어리둥절합니다. 맛이 나쁘다 좋다를 떠나 그냥 없어요. 무미. 청포묵을 간신히 면한 수준입니다.
_107쪽 「아보카도」에서
하지만 버겁고 두려워 피하고만 싶었던 농사의 세계에 다시 뛰어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농사의 신보다 더 지독한 것이 무엇이냐, 바로 죄책감에 미쳐버린 K장녀입니다. 이른 아침, 저는 호미를 들고 엄마의 고구마밭에 섰습니다. 간병에서 도망친 죗값, 고구마로 치르리라!
_122쪽 「고구마」에서
알고 보니 밥과 김치는 양반의 밥이었습니다. 쌀이 의외로 비싼 곡식입니다. 무게당 가격을 따지면 파스타가 쌀보다 쌉니다. 김치는 어떻습니까. 천일염에 절인 배추에 파, 마늘, 고춧가루, 젓갈 등 값비싼 양념을 듬뿍 넣은 노동집약적 발효 요리. 사치품이죠. 제대로 만들면 저렴한 게 이상한 식품입니다.
_134쪽 「밥과 김치」에서
아무거나 실컷 먹어도 건강이 유지되는 초능력이 생긴다면, 저는 살아 있는 내내 빵을 입에 달고 다닐 겁니다. 빵은 사랑입니다. 욕망하는 음식을 폭식하는 공상으로 성장기의 숱한 밤을 지새웠는데, 그 음식은 주로 빵이었습니다.
_146쪽 「빵」에서
나이 들고 좋은 점은 전처럼 대책 없는 자학의 늪에 빠져들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학 외길 인생 40년의 경험에 따르면 그것은 사태 해결에는 하나도 도움이 안 되고 기분만 더 나빠집니다. 외모에 미친 세상과 돈독이 오른 인간들과 미치도록 맛있는 빵을 탓하기로 한 저는 아침·점심·저녁으로 끊임없이 중얼거렸습니다. 빵은 음식이 아니다. 상품이다. 마약이다.
_156쪽 「빵」에서
고기는 피에 젖은 먹이입니다. 동물의 생명을 빼앗아 만든 것입니다. 돈도 못 버는 주제에 뭘 맛있는 걸 먹느냐며 스스로를 다그쳤던 제가 시답잖은 이유로 고기를 먹겠다고요? 풀만 데쳐 먹을 때나 지금이나 뭐 하나 나아진 게 없는데 왜? 감히? 무슨 명분으로?
_162쪽 「고기」에서
열등감 때문에 미쳐버리겠다고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하소연을 했습니다. 제 말에 흠칫 놀란 그들이 말합니다. 지가 열등감이 있는 걸 입 밖에 내는 인간은 처음 봤다고. 열이면 열 똑같은 반응에 제가 더 놀랐습니다. 아니 그럼 대체, 어떻게들 열등감을 처리하고 삽니까?
_188쪽 「술」에서
결혼하지 않는 인생을 택했으나 꼭 해야만 한다면 상대는 효모로 하고 싶습니다. 빵과 술을 만들 줄 아는 세계 유일의 기술자이고, 온도만 맞춰주면 밤새도록 일할 정도로 근면 성실하고, 결정적으로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저한테 결혼당하고 혹사당해도 인상 한 번 쓰지 않고 심지어 잡아먹힐 때조차 불평 한마디 안 할 만큼 착하고 헌신적인 효모.
_195쪽 「술」에서
보다 평온한 곳을 찾아 도서관 인근의 구석진 땅들을 쥐 잡듯이 뒤졌습니다. 작업 10일 차. 포기하지 않고 부지런히 발품을 팔면 원하는 부동산을 만나게 된다더니. 마침내 완벽한 공간을 찾아냈습니다. 그곳은 죽은 자들의 안식처, 공동묘지였습니다.
_203쪽 「끝, 다시 시작」에서
석상 앞에 철퍼덕 앉아 중얼거렸습니다. “안녕. 잘 지냈니. 난 좆됐단다. 글이 안 써져. 죽고 싶구나. 그나저나 너는 코가 날아갔는데도 참 사람 좋게 웃고 있네. 내 등 뒤에 누워 있는 놈은 심지어 죽었잖아.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뒈진 놈과 코 베인 놈 앞에서 배부른 소릴 잘도 지껄였네. 알았어. 반성한다. 잔말 말고 글 쓸게. 근데 그거 아니? 이 고구마 진짜 맛있다!”
_208~209쪽 「끝, 다시 시작」에서
출판사 서평
“몸과 마음을 축내지 않고 길게 버티려면
좋은 먹이를 싸게 확보해야 합니다”
팍팍한 세상에서 나를 지키는 간소한 먹거리 생활
여기 들개이빨이라는 만화가가 있다. 한때 『먹는 존재』(2014)라는 만화로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그렇게 8년, 끓어올랐던 인기는 점점 식어가고 연재는 연이어 거절당한다. 불안한 마음을 안고 어떻게 먹고살아야 할지 고심하고 또 고심했다. 그러다 건강에 이상 신호가 왔다. 생산 활동을 하지 않으면 먹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 그는 먹는 것을 바꾸었다. 바로 재료를 단순하게 요리해 먹은 것. 『나의 먹이』는 한 만화가가 방탕한 식생활을 뒤로하고 간소한 식사를 하게 되면서 생긴 변화와 그 배경에 대해 써 내려간 책이다.
장래희망을 꿔다 놓은 보릿자루로 삼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언뜻 스쳐 지나가는 장난 같은 생각이었지만 곱씹을수록 이거다 싶었습니다. 줄임말도 귀여워요. 꿔보.
어차피 남은 인생 대부분을 싫어도 꿔보로 살게 생겼습니다. 멋쟁이들이 그 어느 때보다도 살판난 이 세상에서, 어떻게 꿔보의 숙명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 오랫동안 누워서 생각했습니다.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이 자신의 멋짐을 크게 떠드는 이 세상에서 죽지 않고 오래 살아남으려면, 역시 꿔보다. 상대적 박탈감으로 몸과 마음을 축내지 않고 지갑을 지키는 최적의 생존 전략으로 그만한 게 없다.
_「시작」에서
꿔보란 ‘꿔다 놓은 보릿자루’의 줄임말로, 자신의 처지가 그야말로 꿔보 같았던 저자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를 삶의 지향점으로 삼기에 이른다. 꿔보 라이프를 위해 “좋은 먹이를 싸게 확보”해야겠다 생각하고, 채소와 콩, 계란, 고기, 아보카도, 우유, 술, 빵 등 12가지의 식재료와 음식을 중심으로 먹는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이와 더불어 그림으로 알려주는 각 재료를 먹는 방법은 각종 배달 음식과 정크 푸드가 넘쳐나는 이 시대에 한결 가벼운 식생활을 몸소 보여주며, 최소한의 음식으로 충만한 생활을 할 수 있는 법을 알려준다.
“자신의 멋짐을 크게 떠는 이 세상에서
죽지 않고 오래 살아남으려면, 역시 꿔보다”
세상 모든 꿔보들을 위한 최선의 생존 전략
꿔보로 살아가기로 결심한 작가는 “이게 내 먹이려니”(본문 30쪽) 하고 원형 그대로의 재료를 먹기로 한다. 꿔보의 기준에 가장 부합하는 채소, 완전식품인 콩과 계란과 우유, 식감과 식물성 불포화지방산을 책임지는 견과류, 맛이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쩐지 멋진 아보카도, 식이섬유 풍부하고 맛도 좋은 고구마, 한국인에게서 빼놓을 수 없는 밥과 김치, 욕망의 결정체 빵, 양질의 단백질 고기, 매혹적인 물질 술이 그것이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자기혐오가 극에 달했던 시절”(본문 32쪽), 채소를 집채만큼 먹으며 인생 최저 몸무게를 보았으나 이내 영양 결핍에 시달린 저자는 단백질을 먹어야겠다고 다짐한다. 그렇게 찾은 것이 콩, 대량의 채소와 함께 콩을 삶아 먹기 시작하자 기운이 생겼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부작용에 직면한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방귀였습니다. 본격적으로 콩을 먹은 후부터 방귀가 잦아졌습니다. 농담이 아닙니다. 내장 어딘가가 잘못됐나 싶을 정도로 끝없이 방귀가 나왔습니다. 그것도 가벼운 리허설 수준이 아닌 굉장히 작품성 있는 방귀가. 하루는 뀌다 뀌다 어이가 없어서 작정하고 횟수를 세어봤습니다. 시간당 최고 기록 57번. 1분에 한 번꼴. 이러고도 사람이 살 수 있을까.
_48쪽 「콩」에서
“‘가늘고 길게’를 지향하는 꿔보로서”(본문 61쪽) 문제를 인식하고 식사 설계를 다시 해야겠다고 생각한 저자는 완전식품에 눈을 뜨고 계란과 우유의 세계로 진입한다. 폭식의 기쁨을 잃은 뒤 유튜브에서 먹방을 보기도 하고, 도무지 무슨 맛인지 모르겠는 아보카도에 빠져 “엄마가 죽다 살아난 당일에 떨이 아보카도를 사 먹는”(본문 112쪽)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고구마를 캐다 농사의 맛을 알아가고, 격한 노동에 “금욕 생활을 때려치우고 빵의 세계로 뛰어”(본문 154쪽)들고, 고기를 앞에 두고 과연 자신이 먹을 자격이 있는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에 맞닥뜨린다. 급기야 궁극의 그것, “중독계의 정통 클래식” 술에 빠져든다. 술에 취하자 잠재워두었던 열등감이 불쑥 솟았고 그것은 쉽게 다스려지지 않았다.
취기가 적당히 오르면 거칠고 험한 세상 한없이 말랑해지고, 작정한 일은 뭐든 해낼 수 있을 것 같고, 지구촌 누구와도 절친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처음에는 와- 취하는 거 왜 이리 좋지 알 게 뭐람 너무 신나 히히히! 이러다가, 문득 어떤 점을 깨닫고 아득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술이 유독 심하게 왜곡하고 마비시키는 것은, 제가 극심한 열등감을 느끼는 영역이었습니다.
_187쪽 「술」에서
한 만화가가 제안하는 열등감을 치료하는 기적의 밥상
“꿔~보, 꿔~보, 꿔허~보 이렇게 염불을 외면서
자꾸자꾸 먹다 보면 적응 못 할 것이 없습니다”
욕망이 들끓는 시대에 평온한 마음을 유지하며 살아가기란 쉽지 않다. 남들은 저만치 달려가는데 나만 여기서 주저앉아 있는 것은 아닌지 초조해질 때면 ‘꿔보’를 돌아보자. ‘꿔보의 도’란 무릇 남에게 신경을 끄고, 나 자신에게도 신경을 끄고, 열심히 일하되 힘들면 때려치우고, 죽지 않을 만큼만 돈을 쓰고, 가공의 맛을 멀리하는 것. 남과 비교하지 않고 나를 지키는 간소한 먹거리 생활을 꾸려간다면 어느새 자기혐오는 옅어지고 알고 보면 모두가 자신만의 꿔보 라이프를 실천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공공도서관에서 글 쓰고 그림을 그리며 방구석에서 최저가를 검색해 장을 보는 만화가는 오늘도 성실하게 꿔보의 삶을 실천하고 있다. 언제고 다시 솟아오를 그날을 묵묵히 기다리며.
비석 앞에 앉아서, 빨리 뭐라도 써야 하는데 왜 이렇게 게으르고 재능이 없을까, 허구헌 날 이렇게 실용성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감정 과잉의 글만 써서 어떻게 먹고 살까, 하고 수치심과 열등감과 자학으로 점철된 넋두리를 코 없는 석상에게 늘어놓으며 계란·고구마·아보카도·견과류 따위를 주섬주섬 꺼내 먹을 것입니다. 아주 가끔 크림빵과 막걸리를 사 먹고 짜릿한 문명의 쾌락에 황송해하면서요.
쓰고 보니 이만하면 엄청 복 받은 인생이네요. 가능하면 오래도록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_214~215쪽 「끝, 다시 시작」에서
기본정보
ISBN | 9788954685559 | ||
---|---|---|---|
발행(출시)일자 | 2022년 03월 24일 | ||
쪽수 | 216쪽 | ||
크기 |
122 * 189
* 19
mm
/ 210 g
|
||
총권수 | 1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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