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의 窓

로제타석 문자를 해독한 샹폴리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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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6. 9.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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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타스톤과 샹폴리옹의 창의성

 

 

1798년 나폴레옹은 3만 8천명의 군사와 학자 175명을 데리고 이집트로 원정을 떠났다. 유럽의 역사와 그보다 조금 앞선 로마 역사밖에 모르던 유럽 사람들에게 로마를 수천 년이나 앞섰던 이집트 문명은 충격적이었다. 유럽인이 원시적인 수렵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이집트에서는 통일 왕국을 이루고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고 있었던 것이다.

이집트 문명이 알려지면서부터, 유럽 사람들은 이집트의 유물과 유적에 새겨진 부호에 담긴 속뜻을 풀기 위해 노력했다. 글자로 보이는 이상한 부호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무덤 안의 벽화나 탑에는 상형문자로 추정되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으나 한 글자도 읽을 수가 없었다.

 

로제타석 (Rosetta Stone)1799년 이집트 북부의 항구도시인 로제타에서 벽을 허무는 작업을 하던 나폴레옹 이집트 원정대의 공병대 장교 피에르 부샤르에 의해 발견되었다. 로제타석은 가로 72cm, 세로 114cm, 두께 28cm인 현무암질 비석이. 그것은 좌상 모서리의 많은 부분이 그리고 우하 모서리가 조금 상실되었다. 비문은 당시 이집트(프롤레마이오스 왕조; 그리스계 왕조)에서 쓰이던 상형문자(하이에로글리프;hieroglyph), 민중문자(데모틱;demotic), 그리스문자 3가지 언어로 표기되었다.

 

 

로제타스톤(Rosetta Stone)은 1799년 나폴레옹 원정군이 알렉산드리아 동쪽으로 60킬로미터 떨어진 로제타(현 지명 라시드;Rashid) 마을에서 요새를 쌓다가 발견했다. 그러나 프랑스 함대는 넬슨(Horatio Nelson, 1758~1805)이 거느린 영국 함대에 의해 괴멸되어서, 프랑스 군대는 아주 어려운 처지에 있었다.

프랑스 군대를 지휘했던 나폴레옹(Napoleon Bonaparte, 1769~1821)은 마침내 조그만 배 두 척으로 이집트를 탈출했고, 뒤에 남겨진 프랑스 군대는 두 해 뒤 영국 군대에 항복했다. 그래서 로제타 비석도 영국 군대에 넘겨졌고 지금까지 대영박물관에 보관되어왔다.

나폴레옹군은 로제타스톤을 석고로 뜬 사본을 프랑스로 가져갔고, 이를 연구한 학자들은 로제타스톤이 같은 내용을 세 가지 종류의 언어로 써놓은 것임을 밝혀냈다.

 

로제타 비석은 검정 현무암으로 만들어진 불규칙한 형태의 비석으로 길이가 114cm이고 폭이 71cm이다. 그것은 고대에 부서져서, 새겨진 글의 상당 부분이 없어졌다. 거기서 사용된 언어들은 이집트어와 그리스어이고 사용된 문자들은 상형문자(hieroglyphics), 민용문자(民用文字, demotic) 그리고 그리스 문자였다.

이집트 문명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언어, 역사, 고고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그리스어 외의 두 문자 해독에 매달렸다. 그러나 천재 언어학자 장 프랑수아 샹폴리옹(Jean-François Champollion, 1790~1832)이 나타나기까지 아무도 이것을 완전히 풀지 못했다. 로제타스톤을 해석하기 위한 천재들의 노력샹폴리옹에 앞서 로제타스톤의 해독에 기여한 인물들을 살펴보자.

먼저 독일의 예수회 성직자인 아타나시우스 키르셔(Athanasius Kircher, 1601~1680)는 동양학, 지질학, 의학에 뛰어난 학자였다. 키르셔의 탁월한 발명 및 지식의 깊이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비교될 정도로 뛰어났다. 키르셔는 상형문자 연구의 선구자로서 후에 샹폴리옹은 로제타스톤을 푸는데 키르셔의 연구 자료를 참고했다.

동양학자 실베스터 드 사시(Silvestre de Sacy, 1758~1838)남작은 로제타스톤에 새겨진 민용 문자(demotic inscription)의 이름을 규명하는데 기여했다. 이어 드 사시의 제자인 스웨덴의 외교관이자 동양학자인 요한 오께블라드(Johan Akerblad, 1763~1819)는 드 사시 남작의 연구를 1802년에 이어받아 두 달 만에 민용 문자의 모든 이름을 밝혀냈다.

토머스 영(Thomas Young, 1773~1829)은 영국의 의사, 물리학자, 생리학자, 언어학자이다. 윌리엄 허셜이나 아인슈타인같은 사람들이 그의 천재성과 박학다식함을 극찬하곤 했으며, 장프랑수아 샹폴리옹이 마지막 작업을 끝내기 전에 이집트 상형 문자(특히 로제타석)를 부분적으로 해독한 것으로 유명하다.

광학, 빛, 에너지, 심리학, 음악, 언어, 이집트학 등에 능통한 영국의 토마스 영 (Thomas Young, 1773~1829)은 14세의 나이에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배웠다. 그는 모국어인 영어 이외에 불어, 이탈리아어, 히브리어, 독일어, 칼데아어, 고대 시리아어, 사마리아어, 아랍어, 페르시아어, 터키어, 암하라어(에티오피아어) 등 14개 언어를 구사하는 천재였다. 영은 오께블라드가 1802년 풀어 놓은 민용 문자 29개 알파벳을 토대로 로제타스톤의 상형문자를 풀려고 노력했다. 문제는 오께블라드처럼 영도 상형 문자가 전적으로 표음문자(음절문자)라고 믿었던 것이었다. 1814년까지 영은 로제타스톤의 민용 문자를 모두 번역한 후, 상형문자를 푸는데 착수했다. 이어 1815년 영은 타원형의 테두리 속 상형문자가 파라오의 이름임을 알아내었다.

 

 

Jean Francois Champollion(1790~1832)은 어학의 천재로서 11세 때 헤브라이어, 12세 때 아랍어 ·시리아어 ·칼디어를 학습하였다. 그르노블대학에서는 고대사와 코프트어를 공부하였으며, 약관(弱冠)으로 모교의 교수가 되었다. 1808년 로제타석(石)의 사본을 입수하여 상형문자 해독에 착수, 1814년 “고대 이집트 사람은 모음(母音)을 쓰지 않은 경우가 매우 많았던 것 같다”라는 탁월한 의견을 내놓기도 하였다. 1822년 카르투시 가운데의 상형문자는 알파벳의 성격을 띤 것이라고 주장하여, 피레섬의 오벨리스크에 새겨진 클레오파트라의 상형문자 사본과 로제타석의 프톨레마이오스의 그것과 비교 ·대조하여, ‘P ·O ·L’에 상당하는 기호가 공통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기에 이르러, 이것을 길잡이로 하여 해독하는 데 성공하였다. 1828∼1829년에는 직접 이집트를 방문하여 많은 각명(刻銘)을 복사하였다.로 해독한 것으로 유명하다.

 

​장 프랑수아 샹폴리옹은 유년 시절부터 언어에 대단한 재능을 보였다. 그는 16세에 대학에 들어가기 전 이미 콥트어(고대 이집트 어의 일종)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1807년 17세의 샹폴리옹은 파리 국립고등학교에서 ‘파라오가 다스리던 때의 이집트’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교수들은 소년의 통찰력과 확고한 논리에 압도당해 발표가 끝나자 그를 교수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20세 되던 해에 샹폴리옹은 모국어인 불어를 포함하여 콥트어,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 암하라어, 산스크리트어, 아베스타어, 아랍어, 영어, 페르시아어, 중국어 등 12개 언어를 구사했다.샹폴리옹은 로제타스톤의 글자를 해독하려면 왕의 이름부터 풀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해독에 몰두했다.

그는 ‘그리스어로 쓰여진 내용은 성직자들이 프톨레마이오스 왕을 칭송한다는 것이므로, 이집트 부호들에도 프톨레마이오스 왕의 이름이 반드시 들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어떤 부호가 ‘프톨레마’를 나타내는지 알면 적어도 몇 개의 발음기호는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믿은 것이다. 샹폴리옹은 부호 가운데 유독 타원형으로 둘러싸인 부호에 주목했다. 특별히 강조된 것이라면 왕의 이름이라고 생각한 것인데, 결과적으로 그 생각은 옳았다.

샹폴리옹은 1821년에 고고학자 뱅크스가 영국으로 가져간 필레섬의 오벨리스크에 적힌 부호들과 견주어 보았다. 이 오벨리스크는 상형문자와 그리스 문자가 함께 씌어져 있어 ‘제2의 로제타스톤’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오벨리스크의 그리스어에도 프톨레마이오스 왕의 이름이 나왔는데, 상형문자에도 로제타스톤의 것과 똑같이 타원에 둘러싸인 부호가 있었다. 그 부호는 의심할 여지없이 프톨레마이오스 왕을 나타내는 부호였다. 이 발견은 상형문자 해독을 위한 첫 성공이었다.

펠레섬의 오벨리스크에는 프톨레마이오스 왕 말고도 타원으로 둘러싸인 부호가 또 있었다. 그리스어에는 클레오파트라라는 이름이 나온다. ‘그렇다면 또 하나의 타원 부호는 클레오파트라 여왕이 틀림없다’고 믿은 샹폴레옹은 프톨레마이오스를 나타내는 부호를 나란히 놓고 비교했다. 그는 두 부호에 다 나오는 기호들을 찾았다. 그것들은 프톨레마이오스와 클레오파트라 두 군데 다 있는 발음기호이니, P, O, L 이고, 그 기호들이야 말로 P.O.L의 발음 기호임에 틀림없었다. 두 번째 성공이었다.

1822년 9월 14일 결국 샹폴리옹은 27개나 되는 파라오 이름을 해독함으로써 이집트 상형문자의 음가를 다 밝혀냈다. S와 m까지 부호가 나타내는 음가를 푼 그는 문득 곱트어에서 태양신을 Ra 라고 하는 것을 생각해 냈다. 거기다가 이집트 말에서 가끔 생략되는 모음 e를 집어넣자 람세스(Ramses)가 되었다. 곧이어 토트메스 왕의 이름도 풀렸다. 그리하여 그는 마침내 상형문자를 푸는 기본 원리를 발표할 수 있었다. 그때 샹폴리옹의 나이는 31살이었다.

샹폴리옹이 “상형문자가 소리글자와 비슷한 성격을 띠고 있다”고 발표하자 학자들은 모두 놀랐다. 그때까지 모든 학자들은 이집트의 기호들을 그림문자로 보아 뜻글자로 해독하려 했다. 이 잘못은 기원 후 5세기 호라플론에서부터 시작되어 1천300년간 그대로 되풀이되어 왔다. 학자들은 상형문자가 마지막으로 쓰여진 시대에 자기들 보다 더 가까이 살았던 호라플론의 풀이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언뜻 보기에 그림과 다름없는 부호들, 그것을 그림 문자로 보아, ‘굽이치는 선’ 세 개가 ‘물’을 나타내고 ‘깃발’이 ‘신’을 나타낸다는 풀이를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던 것이다.

기존 학설에 의문을 제기하고, 역발상적 상상력을 발휘한 샹폴리옹으로 인해 1799년에 발견된 로제타스톤은 23년만에 그 베일을 벗은 것이다. 진정한 비결은 소통과 교류그 후 샹폴리옹은 이탈리아 토리노 박물관에서 옛 이집트의 파라오 이름과 통치 기간이 하나도 빠짐없이 적혀 있는 파피루스를 찾아냈다.

다른 사람이 무심코 지나치던 것을 그는 알아보았던 것이다. 샹폴리옹은 이것을 자료 삼아 이집트에 통일 왕조가 세워진 때를 기원전 5867년이라고 계산했다. 샹폴리옹은 1828년 7월부터 이듬해 12월까지 이집트를 여행했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주장이 옳았음을 확인했다. 모든 신전, 왕궁, 무덤의 비문이 그의 풀이와 정확히 일치했던 것이다.

샹폴리옹은 풍부한 언어적 지식을 바탕으로 상상력을 발휘해 로제타스톤에 쓰인 고대 이집트 어를 풀었다. 샹폴리옹의 상상력은 ‘언어’라는 지식이 토대가 되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샹폴리옹은 여러 언어, 고고학자들과 함께 연구 결과를 공유하면서 해결의 실마리에 접근할 수 있었다. 기존의 패러다임을 넘어선 ‘상상력’으로 오래된 난제를 풀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간과해서는 안 되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키르셔 같은 상형문자 연구의 선구자를 비롯해, 스승 드 사시와 그의 제자인 오케만과의 만남, 토마스 영과 같은 선의의 경쟁자가 있었기에 샹폴리옹은 로제타스톤의 수수께끼를 푸는 마지막 문을 열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로제타스톤을 푼 것은 샹폴리옹에 앞서 연구한 사람들의 공로가 기초가 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또한 혼자서 많은 시간을 들여 연구를 했을 뿐 아니라 그 결과를 서로 나누고 의견을 교환함으로써 지식의 폭과 깊이가 더해졌다. 인류의 발전에 공헌한 천재라 할지라도 주위의 도움 없이 홀로 존재할 수는 없다.

LEECHMA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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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용거머리의 모든 것 이창덕 leechland@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