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02. 05. 

#12. 이번 달 소식 

디자이너 곽해나 인터뷰: 한자 글꼴 제작 이야기
다차원의 디자인을 넘나드는 《디자이닝 프로그램스》
《한글로 빚어낸 방언 다락방》 전시
따옴표레터 만족도 조사
따옴표레터 브런치 개설
최정호 박물관 소식

인터뷰

디자이너 곽해나 인터뷰: 한자 글꼴 제작 이야기

한글 외에도 다양한 언어권의 글꼴을 제작하는 디자이너가 있습니다. 익숙한 로마자를 그리는 디자이너도 있지만 한자를 그리는 디자이너도 있는데요, 이번 따옴표레터에서는 한자 글꼴 〈홍해체〉를 그린 디자이너 곽해나의 제작 경험을 담았습니다.

안녕하세요,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안녕하세요. 프리랜서 디자이너 곽해나입니다. 주로 편집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이하 파티) 더배곳의 졸업작품으로 한자 글꼴인 〈홍해체〉를 제작했습니다. 

한자 글꼴을 만드는 것은 드문 일인데, 시도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요?

저는 글자를 다루는 것을 좋아해요. 파티 더배곳 과정에서도 책을 만드는 편집디자인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당시에 저는 책을 잘 만들려면 편집의 주재료인 글자를 직접 만들 줄도 알아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서 한글 글꼴을 그리는 수업을 듣게 되었어요. 지루하지 않을지 걱정했던 것과 다르게 글꼴을 그리는 작업은 꽤 흥미로웠습니다. 한정된 작은 공간 안에 획과 속공간을 조화롭게 하는 점이 좋았고, 그렇게 글자를 그리는 작업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졸업 전시 준비기간이 되어 주제에 대해서 깊게 고민했습니다. 제 아이덴티티를 담을 수 있는 작품을 하고 싶었어요. 그러던 중에 홍일법사(弘一法師)의 『금강경(金剛經)』 필사본을 보게 되었습니다. 홍일법사의 글씨는 굉장히 매력적이었습니다. 한자를 생각하면 막연히 고리타분하거나 어려운 문자라고 생각하게 되는데, 이 글씨는 둥글둥글한 인상에, 떨어져 있는 획 사이로 보이는 흰 공간 때문에 글자가 여유롭게 느껴졌고 쉽게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글자의 모양이 사람들의 경계심을 허물 수 있다는 점에서 홍일법사의 글씨가 특별하게 보였습니다. 그러다 이 글씨를 글꼴로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중국중앙미술학원에서 유학하면서 한자에 대한 이해도도 생겼기 때문에 다른 언어지만 글꼴로 충분히 만들 수 있겠다 싶었어요. 한자 작업은 저만 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고, 우리나라도 한자문화권으로, 생활 곳곳에 한자가 사용되고 있으니 한자 글꼴을 만드는 것이 의미가 있을 것 같았습니다.

중국 서예가 · 대사 사경 홍일법사 · 금강경, 사천미술 출판사, 2014년 8월 초판 인쇄, 112쪽 (ⓒ 곽해나)

제작하신 글꼴 〈홍해체〉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소개해 주세요.

〈홍해체〉는 본문보다는 로고타입이나 제목으로 활용하기 더 좋은 글꼴입니다. 아무래도 처음 시도해 보는 한자 글꼴이다 보니 본문용으로 제작할 엄두를 내지 못하기도 했습니다. 글자의 가로 폭보다 세로 폭이 긴 장체지만, 동글동글한 획 모양 때문에 사뭇 귀엽게 느껴질 수 있을 것 같아요.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홍일법사의 글씨체는 획이 떨어지면서 중간중간 흰 속공간이 보이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 점을 잘 살리기 위해 신경 썼습니다. 필순에 따라서 획의 떨어짐이 발생하는 부분들이 있는데, 떨어져 있는 정도에 따라서 인상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최대한 홍일법사 글씨와 같은 인상을 담기 위해 적절하게 공간을 남기려고 했습니다.

한자를 쓰는 유형으로 진서, 예서, 해서, 행서, 초서가 있습니다. 홍일법사의 글씨체는 이 중 또박또박 쓰는 정체인 해서에 속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빠른 속도로 쓰인 글씨보다는 조금 더 시간을 들여서 쓴 느낌이 납니다. 한 자 한 자 아주 정성들여 쓴 것 같지는 않지만 홍일법사만의 차분한 속도감이 잘 느껴지도록 했습니다.


그것이 가장 잘 느껴지는 부분이 획의 기울임과 맺고 끊는 모양이라 생각해요. 기울임의 정도에 따라 속도감이 보이기 때문에 기울임 각도를 신경 쓰고, 특히 한 글자 안에서도 그 특징이 잘 보이도록 많이 고민했습니다. 예를 들어 가로획의 경우 짧은 가로획과 긴 가로획은 쓰는 속도가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고, 그에 따라 맺고 끊음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세로획도 마찬가지고요. 글씨의 적절한 속도감을 찾는 것이 원본의 인상을 보여주는 한 방법이었습니다.

〈홍해체〉를 만들면서 어려운 점은 없었나요?

한자는 한 글자의 획수가 많은 것은 60개가 넘어요. 정말 여기에 획이 더 들어갈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많습니다. 일정한 공간 안에 많은 획을 넣는 것도 어려웠지만 획수가 천차만별인 글자의 회색도를 맞춰야 하는 것도 까다로운 점이었어요. 획이 1개인 글자, 20개인 글자, 50개인 글자가 모두 균일해 보이게 획의 굵기나 공간을 조정해야 했습니다.


획수뿐만 아니라 전체 글자 수도 많죠. 글자 수는 약 15만 자 정도고, 상용한자만 추려도 6,000자가 넘습니다. 중국 유학하면서 알고 있는 한자들은 전체 글자의 일부일 뿐이었습니다. 또 한국에서 쓰는 한자와 중국에서 쓰는 한자가 다른 경우도 많았고요. 글꼴을 만들다가 모르는 글자가 많아서 당황했었는데요, 디자인을 한 것이 맞는지 스스로 확인할 수 없는 점이 답답했습니다. 모르는 글자를 만들 때는 다른 글꼴의 공간을 많이 참고했습니다. 특히 당나라 시대의 명필가인 안진경의 해서를 많이 보았습니다. 


모르는 글자가 많다 보니 전체를 파생하는 과정도 시간이 오래 걸리게 되었습니다. 한자는 ‘부수’라는 공통으로 쓰이는 요소가 있습니다. 같은 부수를 공유하는 글자들을 묶어서 만들면 한 글자씩 만드는 것보다 훨씬 효율적으로 제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체 글자 모르다 보니 부수를 공유하는 글자들을 모으는 데에도 어려움이 있더라고요.

한자 글꼴을 만드는 과정이 궁금해요.

중국의 글꼴 디자이너들이 어떻게 작업하는지는 자세히 알 지 못해서 〈홍해체〉를 만들었던 제 경험을 바탕으로 말씀드릴게요. 저는 가장 먼저 일(一)에서 십(十)까지 숫자를 만들었습니다. 간단하고 익숙한 글자이면서도 가로획과 세로획, 점이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거든요. 그 외에도 구조를 파악하기 쉬운 비교적 단순한 글자를 먼저 그려보면서 전체적인 조형 특징을 파악하고 정리해 나갔습니다. 이를 활용해 부수자를 만들었고, 같은 부수를 사용하는 글자를 묶어서 파생했습니다. 어느 정도 글자 수가 채워진 후에는 판짜기를 하면서 전체적으로 회색도가 고른지 꾸준히 확인했고요. 다만, 전시를 위한 작업이어서 기간 내에 가능한 범위까지만 글자를 만들었습니다. 나머지는 전시 이후에 마무리하는 것으로 계획했습니다.

한자 글꼴을 만들 때 가장 중요한 점을 꼽는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회색도를 맞추는 작업인 것 같습니다. 다양한 획수의 글자가 문장 안에 있을 때 튀지 않고 고르게 보여야 하니까요.

한자와 한글을 비교한다면 어떤 점이 닮았고, 어떤 점이 다를까요?

일반적인 본문용 글꼴을 기준으로 비교하면, 한자와 한글은 모두 전각의 네모틀 안에서 그려집니다. 그런데 한글은 그 안에서 글자마다 균형이 미묘하게 달라서 다루기 까다롭지만, 한자는 네모틀 형태를 유지해 조금 더 단순한 부분이 있습니다. 한자는 글줄을 맞출 때 칸 안에서 획의 위치를 한글보다 훨씬 간단하게 결정지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일(一)’을 네모 칸의 한가운데 위치시켜도 크게 이상하지 않은데요. 한자는 중심부에서부터 글자를 쓰기 시작하기도 하고, 한문 연습 칸이 익숙해서인지 중국 사람은 정중앙에 글자가 위치하는 것을 어색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반면, 한글은 ‘그'나 ‘으' 같이 단순한 글자를 어디에 위치시킬지 수없이 고민하게 됩니다.


전각 틀을 유지하는 한자 조형의 특징은 조판에도 영향을 줍니다. 한자는 특히 띄어쓰기 없이 양끝맞춤을 기본으로 하므로 행간만 적당하다면 기본적인 조판은 한글보다 쉽게 할 수 있습니다. 또 전각이기 때문에 가로쓰기를 세로쓰기로 바꿔서 조판해도 어색하지 않고요.


하지만 세로쓰기를 한 해서체 필사본의 경우에는 가로쓰기와 세로쓰기의 호환을 맞추기 어려웠습니다. 

〈홍해체〉가 여기에 해당하는데, 획수가 많은 글자는 세로 폭이 길고, 획수가 적은 글자는 폭이 짧아서 이걸 가로로 바꿀 때 공간이 들쭉날쭉해보이지 않도록 신경 써야 했습니다. 이런 점은 한글과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앞으로 더 한자 글꼴 작업을 하실지 궁금합니다. 한글 글꼴 제작 계획도 있으신가요?

〈홍해체〉를 만들고 나니 글자를 만드는 것보다 다루는 일이 더 잘 맞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글꼴은 〈홍해체〉를 만든 것으로 만족하려고요. 아쉽지만 앞으로 글자를 더 만들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홍해체〉도 처음엔 틈틈이 작업해서 6,000자를 모두 채워 보려 했지만 쉽지 않더라고요. 계속 지금 상태 그대로이지 않을까요? (웃음)


그래도 글꼴을 직접 만들어보니까 글꼴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졌습니다. 이 글자는 제작자가 어떤 이유에서 이렇게 그렸는지 글자를 만드는 사람의 입장도 이해됐고요. 글꼴 느낌을 빠르게 파악할 수 있게 되니 원고 성격에 맞는 글꼴을 찾는 것도 쉬워졌습니다. 저는 높은 완성도로 잘 만들어진 글꼴을 다루는 것을 즐거워합니다. 글자를 잘 만드는 것과 별개로 잘 쓰는 것은 또 다른 문제거든요. 좋은 글꼴을 알아볼 수 있는 눈과 기준이 생겼으니, 앞으로도 그런 글꼴을 찾아 섬세하게 다뤄보고 싶습니다. 

책 소개

다차원의 디자인을 넘나드는 《디자이닝 프로그램스》

스위스의 디자이너이자 예술가 카를 게르스트너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타이포그래피, 그래픽 디자인의 역사와 발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입니다. 게르스트너의 가장 중요한 작업으로 꼽히는 『디자이닝 프로그램스』는 네 편의 이론적 글을 모은 선집입니다. 개인용 컴퓨터가 보급되기도 전인 1959년에서 1963년 사이에 작성된 이 책은 컴퓨터 시대 초기 디자인의 기초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디자이너가 해당 작업에 대한 모든 심미적 결정을 주관하게 될 혁신적인 법칙이나 시스템을 제안합니다. 


글꼴 실험에 관한 내용도 있습니다. 게르스트너는 산세리프가 미래의 타이포그래피를 위한 글자라고 주장하며 악치덴츠 그로테스크로 글자의 확장 체계를 고안하고 직접 활자체도 만들었습니다. 이후 2017년, 포가튼 쉐이프스(Forgotten Shapes)가 이를 디지털 폰트로 발매했습니다.

작은 소식

《한글로 빚어낸 방언 다락방》 전시

서울여자대학교 시각디자인전공 소학회 한글아씨에서 사투리를 주제로 한글 레터링 전시를 엽니다. 여섯 팀의 작품과 개인 작업의 구성으로, 낯선 사투리가 주제인 만큼 우리가 지금까지 익숙하게 봐온 글자를 벗어나 다양하고 풍성한 한글의 모습이 기대되는 전시입니다.


전시 기간: 2024.02.06. (화) ~ 03.03. (일)

전시 장소: 세종문화회관 한글갤러리

전시 시간: 10:00 ~ 18:30 (오후 6시 입장 마감)

유의 사항: 매주 월요일 휴무

(단, 월요일이 법정 공휴일인 경우 정상 운영)

따옴표레터 만족도 조사

따옴표레터 잘 읽고 계시나요? 어느덧 AG타이포그라피연구소가 뉴스레터를 발행한지 1년이 되어 12호를 발행합니다. 더 알차고 풍성한 소식으로 꾸리기 위해 구독자분들의 의견을 듣는 설문조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2월 11일까지 참여하신 분들께 푸른 용띠의 해를 맞아 용(龍) 혁필화를 재해석한 연하장을 보내드립니다. 많은 참여 바랍니다.

따옴표레터 브런치 개설

AG타이포그라피연구소가 브런치스토리 운영을 시작힙니다. AGTI의 브런치스토리에서는 따옴표레터의 소식을 다시 보고 싶은 분들을 위해 지금까지 발행된 이야기를 아카이빙합니다. 그 외에 따옴표레터에 담지 못한 연구소 소식도 비정기적으로 올릴 예정입니다. 구독과 댓글, 라이킷 모두 환영하며, 글에 대한 의견이나 궁금한 내용은 댓글로 남겨주세요 :)

최정호 박물관 소식

지난해 11월 30일, 최정호 박물관이 온라인으로 문을 열었습니다. 감사하게도 월간 디자인에서는 전반적인 웹사이트 소개를, 조선일보에서는 웹사이트 콘텐츠에 대한 감상평을 기고해주셨습니다. 최정호 박물관에 관심을 갖고 기대해 주시는 만큼, 한글꼴 디자인의 기틀을 다진 최정호 선생님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도록 힘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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