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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폭력 피해자는 침묵한다... 사랑해서가 아니라 탈출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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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폭력 피해자는 침묵한다... 사랑해서가 아니라 탈출하기 위해서

입력
2021.03.18 16:16
수정
2021.03.18 16:41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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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키가 샐리의 집에 나타났다. 샐리는 미셸의 지시에 따라 앞문으로 달려가 문을 잠갔다. 분노로 일그러진 그의 얼굴은 충격적이었다. 그는 문을 향해 자기 몸을 던졌고 문에 금이 가는 소리가 났다. (중략) 아이들은 무서워하지도, 히스테리를 부리지도 않았다. 맙소사. 샐리는 생각했다. 이 아이들은 전에도 이걸 본 적이 있구나. 아빠가 이러는 걸 본 적이 있구나. (살릴 수 있었던 여자들, 92쪽)

‘남편이 장모가 사는 집의 뒷유리창을 깨고 안으로 들어가서 아홉 살짜리 딸을 데리고 나왔다.’ 2001년 9월 말 미국 몬태나주의 소도시에서 벌어진 가정폭력 사건을 경찰은 이렇게 기록했다. 보고서에는 사납게 몰아친 남편 로키의 분노가 담기지 않았다. 가족이 겪었던 공포도, 산산이 부서진 유리 파편도 없다. 경찰은 경범죄를 저지른 남편을 체포해 유치장에 가뒀을 뿐이다. 법적으로 어떤 오류도 없는 조치다. 두 달 뒤, 로키는 아내 미셸과 두 자녀를 집에서 살해한다.


2016년 5월 17일 새벽 서울 강남역 인근 화장실에서 23세 여성이 30대 남성에게 살해당한 이튿날, 강남역 출구에 시민들이 모여 피해자를 추모하는 스티커를 붙이고 있다. 여성학자 정희진은 공적영역에서 발생한 이러한 사건들로부터 한국사회에서 '페미니즘의 대중화'가 일어났지만 가정폭력은 아직도 개인사로 치부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2016년 5월 17일 새벽 서울 강남역 인근 화장실에서 23세 여성이 30대 남성에게 살해당한 이튿날, 강남역 출구에 시민들이 모여 피해자를 추모하는 스티커를 붙이고 있다. 여성학자 정희진은 공적영역에서 발생한 이러한 사건들로부터 한국사회에서 '페미니즘의 대중화'가 일어났지만 가정폭력은 아직도 개인사로 치부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가정폭력 사건이 발생했을 때 대중은 피해자를 동정하지만은 않는다. 피해자 대다수를 차지하는 여성을 향한 시선에는 의문이 섞여 있다. “남자는 좀 이상한, 나쁜 사람이니까 그렇다 치자. 이해가 안 되는 건 여자야. 그 여자는 왜 좀 더 일찍 도망치지 않았을까? 남편을 사랑했나? 먹고살 자신이 없었나? 그 여자는 왜 남편에게 붙어 있었을까?”

질문들의 뿌리에는 가정폭력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어서 하늘도 막지 못할 사고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불쌍하긴 한데. 부부끼리 집에서 벌이는 일을 누가 알겠어. 안방마다 CCTV를 설치할 수도 없는 일이지. 애석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살릴 수 있었던 여자들’(시공사)은 미셸이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발자취를 재구성하면서 질문들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고 답한다. 피해자의 몸부림을 주변에서 알아챈다면 가정폭력은 얼마든지 예방할 수 있다고 선언한다. 2000년부터 2006년 사이에 복무 중 목숨을 잃은 미군(3,200명)보다 가정 내 살인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피해자(1만600명)가 3배 이상 많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가정폭력을 개인적 불행에서 예방 가능한 재난, 공중보건의 영역으로 끌어올린다.

책은 로키에게서 보였던 폭력의 징후, 미셸이 무심코 보냈던 신호들을 복기한다. 친정, 시댁, 친구부터 경찰, 의료인까지 사회 구성원들이 징후와 신호를 해석하는 방법을 알았다면, 그래서 제때 행동했다면 그녀를 살릴 수 있었던 순간들이 너무나 많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피해자는 결코 가만히 앉아서 죽음을 맞지 않는다고 증언한다. 괴물을 자극하지 않고 자신과 아이들을 지키며 안전하게 떠날 수 있는 기회를 엿본다.

미셸 역시 그랬다. 로키가 샐리의 집을 때려 부순 혐의로 체포됐다가 보석으로 풀려난 이후, 미셸은 스스로 로키에게 내려진 접근금지 신청을 철회했다. 미셸은 흥분 상태로 검사의 사무실에 난입해 외쳤다. “남편은 절대 위험하지 않았어요. 다 제 탓이에요. 로키는 훌륭한 남편이에요.”

로키를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에서 풀려난 성난 곰이 자신과 아이들을 해치기 전에 진정시키기 위한 행동이다. 로키가 법에 따라서 석방됐을 때 그녀의 집에 검사가 있을까? 총을 든 경찰이 있을까? 어떤 시스템이든 낮에도 새벽에도 미셸을 지켜줄 수 있을까? 총성이 울려야 출동할 경찰은 미셸을 지킬 수 없다. 그러나 경찰도 검사도 가족들도 신호를 제대로 해석하지 못했다. 저마다 신호를 포착했지만 정보들은 단절됐고 피해자는 사각지대에서 고립됐다.

‘정상적 가족’을 지키려는 노력도 때때로 비극을 부른다. 미셸의 아빠는 로키가 감옥에서 풀려나 집으로 찾아오자 손자와 손녀를 내주기까지 했다. 그가 아이들에게 영화를 보여주고 싶다고 했기 때문에. 친정과 시댁 모두 미셸과 아이들을 사랑했다. 사랑했기에 제대로 판단하고 개입하지 못했다. 그들 모두 미셸과 그녀의 가정을 지키려 노력했지만 결말이 잔인한 비극으로 끝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책의 후반부는 미셸의 죽음 이후를 다룬다. 피부의 멍, 목이 졸린 자국부터 살해 위협을 받았는지 여부 등 다양한 지표로 가정폭력 위험을 측정하는 위험평가 지표가 점차 의료계에 퍼지고 있다. 병원에서부터 가정폭력 피해자를 찾아내기 위해서다. 2005년부터는 미국 최초의 공식적인 가정폭력고위험대응팀이 만들어져 사례들을 관찰하고 대응책을 개발하고 있다.

사건 파일이 쌓여나갈수록 사각지대는 줄어든다. 그러나 그 속도는 언제나 필요한 수준보다 느리다. 책의 말미에서 가정폭력 신고를 받고도 피해자를 구하지 못했던 전문가가 나타나 고백한다. 그녀가 살아 돌아온다면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다고. 그 미안함은 모두의 몫이다.


'살릴 수 있었던 여자들'. 레이철 루이즈 스나이더 지음ㆍ성원 옮김ㆍ시공사 발행ㆍ488쪽. 1만9,800원

'살릴 수 있었던 여자들'. 레이철 루이즈 스나이더 지음ㆍ성원 옮김ㆍ시공사 발행ㆍ488쪽. 1만9,800원



김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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