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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세상의 파괴자 됐다" 오펜하이머 일대기

by 버핏킴즈 2023. 8.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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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버핏킴즈입니다. 미국 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의 아버지’와 ‘군축의 아버지’라는 두 개의 정반대 별명으로 불리며 그의 복잡한 역사와 업적을 나타내는 인물로 꼽히고 있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전기 영화 '오펜하이머'는 이러한 인물의 삶을 그려내며 주목받았으며, 미국 등에서 이미 개봉하여 흥행을 거둔 작품입니다. 오펜하이머는 원폭 개발에 성공한 '맨해튼 프로젝트'의 리더로서 2차 세계대전 종결에 기여한 영웅으로 동시에 인류에 위협적인 무기를 안겨준 인물로서 양면적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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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영미권에서 오펜하이머의 재조명 작업이 활발히 이뤄지는 가운데 개봉되었으며, 그의 지식과 업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난 세상의 파괴자가 됐다" 오펜하이머 일대기
"난 세상의 파괴자가 됐다" 오펜하이머 일대기

어린시절의 탐구정신과 교육

1904년 4월 22일에 태어난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독일계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어린 시절은 뛰어난 지적 호기심과 탐구 정신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7살 때 할아버지로부터 받은 광석 세트를 계기로 결정 구조와 빛의 편광 등에 대한 흥미를 갖게 되었고, 12세 때는 뉴욕 광물학 클럽 회원들에게 서한을 주고받으며 어린이임에도 불구하고 세미나 연사로 초대되기도 했습니다.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그는 지적 호기심이 높아 영어뿐만 아니라 그리스어, 라틴어, 프랑스어, 독일어, 네덜란드어, 산스크리트어 등 총 7개의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으며, 시를 즐겨 썼습니다. 그는 탐구와 창조의 열정을 가진 천재적인 인물로서 역사에 남게 되었습니다.

 

 

오펜하이머 양자역학과 핵무기 연구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양자역학 분야에서 혁신적인 연구를 수행하여 1920년대부터 30년대에 걸쳐 양자역학의 기초를 다지고 새로운 이론을 제시했습니다. 그의 업적으로 1939년에는 노벨 물리학상 후보로 뽑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오펜하이머는 역사적으로 최고의 물리학자로 인정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노벨상을 받지 못한 인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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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구와 창조의 미학" 알버트 아인슈타인 일대기 - 부자로 가는길 365 (byhan365.com)

 

"탐구와 창조의 미학" 알버트 아인슈타인 일대기 - 부자로 가는길 365

천재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의 일대기에 대해서 간략하게 정리해 놓은 글입니다.

byhan365.com

 

1945년, 1951년, 1967년에 노벨물리학상 후보에 올랐지만 선정되지 않았습니다. 그의 경우 노벨상을 받기 위해서는 한 가지 분야에 집중하여 연구하고 그 분야에서 성과를 내야하는 노벨상의 조건에 부합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평가되었습니다. 오펜하이머는 여러 분야에서 나온 성과를 종합하고 결합하여 새로운 결과를 도출하는 일에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노벨 스타일'과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한편, 그는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한 동료들 중 18명이 노벨상을 수상하는 등 그의 업적이 인정받았습니다.

 

 

맨해튼 프로젝트와 원자폭탄 개발

뉴욕 출신인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물리학과 뉴멕시코주를 생전에 가장 사랑하는 두 가지로 꼽았습니다. 어린 시절 뉴멕시코를 여행한 경험은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는데, 그곳의 황량하고 광활한 풍경은 그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래서 '맨해튼 프로젝트'의 본부가 뉴멕시코주에 설치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 그의 애정이 반영된 결정이었습니다. 맨해튼 프로젝트는 미국의 제2차 세계대전 참전 중에 시작된 프로그램으로, 핵무기 연구를 위해 과학자와 공학자들을 모아둔 육군 공병대의 연구 시설이었습니다. 이 프로젝트에서 사용된 이름 '맨해튼'은 초기에 이 프로젝트의 연구 기반시설 중 상당수가 뉴욕 맨해튼의 컬럼비아대에 있었던 데서 유래했습니다. 프로젝트 자체는 맨해튼에서 진행되지는 않았지만 초기 연구가 맨해튼에서 이뤄져 '맨해튼 프로젝트'라는 암호명이 사용되었습니다.

맨해튼 프로젝트 오펜하이머
맨해튼 프로젝트 오펜하이머

제2차 세계대전 중, 오펜하이머는 맨해튼 프로젝트의 핵무기 연구팀의 리더로 참여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원자폭탄의 개발을 목표로 한 미국의 최상급 기밀 프로그램이었습니다.

맨허튼 프로젝트 더 알아보기

오펜하이머와 그의 연구팀은 원자폭탄의 핵분열 반응과 관련된 핵물리학적 이론과 실험을 주도하여 프로젝트의 성공을 이끌었습니다. 그의 뛰어난 지식과 리더십은 원자폭탄 개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 기록에 남아있습니다.

 

 

그로브스 장군의 전폭적인 지지

맨해튼 프로젝트는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2년부터 1945년까지 진행된 미국의 최상급 기밀 프로그램으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레오 시라도 등 물리학자들이 나치 독일의 원자폭탄 개발을 막기 위해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경고한 편지를 계기로 시작되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원자폭탄의 가능성을 실감하게 하면서 추진되었습니다. 이 프로젝트를 주도한 인물 중 하나는 레슬리 그로브스 장군이었습니다. 그로브스 장군은 원자폭탄 개발의 총 책임자로서 미국 육군의 장군이었으며, 과학자들과 협력하여 원자폭탄의 개발과 생산 시설 구축을 주도했습니다. 또한 오펜하이머는 맨해튼 프로젝트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는 핵분열 및 핵물리학적 이론과 실험을 주도하여 프로젝트의 성공에 기여했습니다. 그의 지식과 노력은 프로젝트의 성과에 크게 기여했으며, 프로젝트의 주요 인물 중 하나로 평가받았습니다.

그로브스 장군의 전폭적인 지지
그로브스 장군의 전폭적인 지지

이 프로젝트는 최종적으로 1945년 8월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어 제2차 세계대전을 종식시켰습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 핵무기의 파장과 위험성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맨해튼 프로젝트는 과학의 발전과 동시에 인류에게 큰 경고를 남긴 사건으로 평가되며, 미국의 과학력과 기술력을 대표하는 중요한 사례입니다.

 

 

엄청난 애연가 오펜하이머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뛰어난 애연가로도 유명했습니다. 그의 사진들은 대부분 담배를 입에 물고 있는 모습으로 찍혔는데, 이는 그가 담배를 끊지 않는 것을 상징하는 듯했습니다. 특히 맨해튼 프로젝트 진행 당시, 오펜하이머는 식사를 거의 하지 않아서 몸무게가 50㎏로 떨어진 정도였지만, 담배만큼은 계속 피우며 살아갔다고 합니다. 하루에도 100개 이상의 담배를 피웠다는 증언도 있었습니다. 오펜하이머가 입에 물고 있던 담배는 '체스터필드'였는데, 이 담배는 그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담배 습관은 결국 인후암으로 그의 생을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애연가 오펜하이머
애연가 오펜하이머

그가 유명해진 후에는 영향력이 커져 청년들 사이에서도 그를 따라 담배를 피우는 것이 유행하기도 했습니다. 영화에서 오펜하이머 역을 맡은 배우 킬리언 머피는 촬영 중에는 니코틴이 없는 허브 담배를 피웠다고 전해졌습니다. 또한 그는 아몬드만 먹는 극단적인 다이어트도 시도했다고 합니다. 이런 점들이 오펜하이머의 독특한 성향과 생활 방식을 반영한 이야기들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펜하이머 아인슈타인과의 대립

로버트 오펜하이머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물리학계에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로서 유사한 면모를 지닌 동시에 각자의 독특한 길을 걸어갔습니다.

둘은 1920년대에 독일 괴팅겐 대학에서 공부할 때 처음 만났는데, 아인슈타인은 맨해튼 프로젝트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미국이 원자폭탄 개발을 추진할 때 나치 독일보다 빠르게 원폭을 개발해야 한다는 제안을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하였습니다. 두 사람은 대체로 의견이 일치하는 편이었지만 매카시즘(반공산주의 운동)이 미국에서 확산될 때 그들의 태도는 다르게 나타났습니다. 오펜하이머는 정치적인 공격에 쉽게 당하면서도 저항하지 않고 있었지만, 아인슈타인은 이에 반발하여 사회적인 운동가의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아인슈타인과 오펜하이머
아인슈타인과 오펜하이머

이렇게 둘의 차이는 그들이 사회 및 정치적인 활동에 대한 접근에서 나타났으며, 이는 그들의 인물적인 특성과 신념의 차이를 반영한 것으로 평가됩니다.

 

핵무기의 도래와 윤리적인 고민

1945년, 맨해튼 프로젝트의 성공으로 원자폭탄이 개발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 발생한 핵무기의 위험성과 윤리적 고민은 오펜하이머의 내면을 뒤흔들게 했습니다. 이 고민은 그가 단순한 물리학자로서의 업적 뿐만 아니라 인류의 미래에 대한 책임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게 만들었습니다. 핵무기의 파괴력과 잠재된 위험성은 인간적 비용이 지불되어야 함을 명확히 했습니다. 오펜하이머는 이러한 위험성을 인식하고, 원자폭탄의 확산 방지를 위한 대안을 모색하였습니다. 그는 핵무기의 확산으로 인해 국제사회의 불안정과 전쟁 위험 증가에 경고하며, 국제적 핵 무기 통제를 촉구하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또한 그는 핵 실험 중단을 촉구하는 운동을 주도했습니다. 환경 오염과 인간 건강에 대한 우려를 제기하며, 핵 실험 중단을 위한 국제적 노력을 이끌었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나중에 1963년에 핵 실험 금지 조약에 영향을 미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오펜하이머의 행동은 그가 물리학자로서만이 아닌 윤리적 책임을 지닌 시민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려는 노력을 보여줍니다. 그는 자신의 업적을 넘어 핵무기의 위험과 확산을 예방하기 위한 노력에 기여했으며, 이는 그의 인류애와 지적 호기심을 함께 반영한 결과입니다.

 

오펜하이머의 역경과 남겨진 유산

1954년, 오펜하이머는 어려운 시기를 겪었습니다. 그는 공산주의자나 스파이로 몰려 비난을 받았지만, 1963년에는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아틀랜틱 시티 연설에서 오펜하이머의 모습이 보여지며 그의 업적이 인정되었습니다. 이로써 그는 컴퓨터 과학과 물리학의 대가로서의 지위를 재확인받았습니다. 그의 유산은 핵무기의 위험성과 윤리적 고민에 대한 인식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는 자신의 물리학적 발견뿐만 아니라 과학과 인류의 미래에 대한 심오한 사고를 통해 핵무기의 책임과 영향을 깊이 고찰했습니다. 이로써 그의 업적은 과학적 발견을 넘어서 인류의 번영과 더불어 윤리적 고민을 갖는 인물로서의 중요성을 보여주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컴퓨터 과학과 물리학의 선구자로서 빛나며, 그의 노력은 현대 과학과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오펜하이머의 윤리적인 고민과 학문적 업적은 미래의 세대들에게 컴퓨터 과학의 길을 안내하는 중요한 기둥으로 남아있습니다.

 

마치며

할리우드에서는 오펜하이머의 일대기를 다룬 최소한 두 편의 영화가 존재합니다. 롤랑 조페 감독의 '멸망의 창조' (The Day After Trinity, 1989년)와 '시작과 끝' (The Beginning or the End, 1947년)입니다. 이 외에도 1980년대에 BBC에서 방영한 7부작 드라마 '오펜하이머' (Oppenheimer)도 있습니다. '멸망의 창조'는 오펜하이머와 맨해튼 프로젝트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로, 오펜하이머의 역할과 핵무기 개발 과정을 담아내며 내면과 윤리적 고민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컴퓨터 그래픽 발전 이전에 제작된 작품으로, 원자폭탄과 관련한 어설픈 묘사와 역사적 고증의 부족으로 인해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시작과 끝'은 원자폭탄의 개발과 맨해튼 프로젝트를 주제로 다룬 영화로, 제작 시기의 제약으로 역사적 사실을 정확히 반영하기 어려웠습니다. 한편, 1980년대 BBC의 7부작 드라마 '오펜하이머'는 상대적으로 충실한 내용과 탁월한 연출로 오펜하이머와 맨해튼 프로젝트를 다루었습니다. 이 작품은 오펜하이머의 생애와 역할을 상세히 다루며 핵무기 개발과 관련된 윤리적 고민과 역사적 배경을 훌륭하게 보여주어 골든글로브와 에미상 등 주요 드라마상 후보로 올랐습니다.

과연 이번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펜하이머"는 어떠한 결과를 낳아줄지 사뭇 기대하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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