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일터의 기억과 삶의 기억을 분리하는 드라마 ‘세브란스 : 단절’
 일터의 기억과 삶의 기억을 분리하는 드라마 ‘세브란스 : 단절’
ⓒ Apple TV+

관련사진보기

 
회사에서는 회사 밖의 나를 완벽하게 잊고, 퇴근하면 회사에서의 기억을 삭제한다. Apple TV+ 웹드라마 <세브란스 : 단절>은 이런 상상력으로 진행된다. 뇌에 칩을 넣으면 회사에서의 나와 삶에서의 나를 완벽하게 단절할 수 있다. 가족을 잃은 슬픔도, 설레는 여행 계획도 회사 안의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 한다. 그저 일에만 완벽하게 집중하는 설정값을 갖는다. 회사만 나서면 상사에게 얼마나 깨졌는지, 어떤 성과를 올렸는지 모른 채 오롯이 내 삶을 살면 된다.

어찌보면 완벽한 두 개의 나를 만들어 마음 편히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는 그야말로 '단절'이다. 사람은 다중 정체성을 갖는다. 노동자로서의 나와 아이를 양육하는 나, 아픈 부모를 돌보는 나, 영화를 좋아하는 나 혹은 사회문제를 고민하는 나 등등. 이 수많은 정체성이 '나'라는 사람을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하지만 한국이라는 땅에서 회사는 노동자가 다른 정체성을 갖지 않은 채 오로지 일하는 도구로서만 존재하기를 요구한다. 한국의 모범 노동자 기준이 그렇다. 회사가 원하는 대로 장시간 노동을 견뎌낼 수 있는 자만이 살아남도록 구조화 되어 있다.    노동시간 재량권은 노동자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노동자는 회사에서 지시하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다. 회사가 요구하는 장시간 노동은 그 뒤에 그림자 노동을 하는 돌봄노동자가 반드시 있다는 전제 하에 강행된다. 노동자는 깔끔한 옷을 입고 적당히 차 있는 위장과 함께 출근하도록 요구된다. 지금 당장 일을 할 수 있는 몸과 마음의 상태를 만드는 것은 철저히 개인의 몫이다. 이 완벽한 준비상태는 기본으로 수렴된다. 타인을 돌보는 시간은 더더욱 고려되지 않는다.

모든 노동자는 다중정체성을 지닌 사람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노동자로서만 존재할 것을 요구받고, 그래야만 모범 노동자로 인정받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타인의 돌봄노동이 필요하다. 이러한 구조는 장시간 노동을 하는 남성과 가사돌봄노동을 전담하는 여성이라는 성별분업을 낳는다. 장시간 노동이 요구될수록 이 구조는 강화된된다. 노동자의 시간은 장시간 노동이 가능한 남성을 기준으로 구성된다. 여성에게 시간제 노동이 권장되는 이유이고, 성별임금격차가 발생하는 주요 원인이다. 

남성중심으로 구성된 장시간 노동 체제의 문제점

이런 현실에서 정부가 지금껏 추진해 온 정책은 '여성'들이 일과 가정을 양립할 수 있도록 제도적 보완을 하는 것이었다. 육아휴직, 시차출퇴근제, 재택근무, 육아기 노동시간 단축 등 정책 이용자는 주로 여성이었다. 이러한 제도들의 맹점은 가사돌봄노동은 여성의 일, 생계부양은 남성의 일 이라는 전제를 수용한 채 진행되는 것이다. 분명 남성에게도 열려있는 제도이지만 남성이 사용할 것으로 기대되지 않는다. 제도를 사용하는 남성은 조직 내 낙오자, 승진 포기자로 분류된다.

제도를 사용하는 여성은 2등 노동자 낙인을 피할 수 없다. 결국 노동시간은 성별에 따라 다르게 구성된다. 가정 내에서의 시간 역시 성별에 따라 다르게 조직된다. 장시간 노동을 하며 여성에 비해 높은 임금을 받아 생계부양자의 자리를 점하는 남성은 가정에서의 시간은 쉼과 휴식으로 간주한다. 반면 여성의 시간은 가사돌봄노동으로 채워진다. 전일제 가사돌봄노동이 필요한 경우, 성별임금격차 탓에 상대적으로 낮은 임금을 받는 여성들이 전담하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 된다. 성별임금격차는 노동시장 성차별의 결과이지만 다시 성별임금격차를 강화하는 악순환을 만들고 있다.

일생활균형이란 노동자가 혼자 살건 어떤 가족구성원과 함께이든 자신의 삶의 시간을 스스로 조직할 수 있는 시간주권을 확보하는 것이 핵심이다. 하지만 지금껏 정부가 추진해 온 정책은 여성들이 임금노동과 가사돌봄노동을 전담하며 이를 양립하기 위한 환경을 만드는 목적으로 진행되었다. 문제는 남성들의 노동시간을 줄이고 가정으로 들어오기 위한 정책적 구상이 부재하다는 점이다. 노동시장 성차별 해소의 핵심 과제 중 하나는 남성중심으로 구성된 장시간 노동 체제를 흔드는 것이다.

여성들이 노동시장으로 진출한 만큼 남성은 가정으로 들어와야 한다. 이는 모든 노동자가 지닌 인간으로서의 다중정체성을 인정하고 노동자의 시간주권을 인정하는 관점으로 노동시간을 바라보아야 가능하다. 하지만 한국의 장시간 노동은 너무나 굳건하다. 심지어 정부는 이러한 현실을 더욱 강화하려 하고 있다.  

자본의 요구만 떠받드는 정책
 
채용과정에서 겪은 성차별에 대한 온라인 설문조사 결과를 워드 클라우드로 작업
 채용과정에서 겪은 성차별에 대한 온라인 설문조사 결과를 워드 클라우드로 작업
ⓒ 한국여성단체연합

관련사진보기

 
지난 24일 발표에 따르면 정부는 현재 1주에 최대 52시간(기본 40시간+연장근로 12시간)까지만 가능한 노동시간의 관리단위를 월·분기·반기·연 단위로 확대하는 안을 추진 중이다. 검토 중인 여러 안 중에는 1주 최대 노동시간을 64시간으로 제한하되 11시간 연속 휴식 제도는 적용하지 않는 방안도 포함되어 있다. 

노동자의 시간을 임금노동으로만 채우려는 자본의 요구만을 떠받드는 정책이다. 현재보다 더 긴 장시간 노동체제는 모든 노동자의 건강과 삶을 위협하지만 여성에겐 특히 더 치명적이다. 현재보다 더 긴 장시간 노동이 요구될 경우, 남성들의 가사돌봄 분담은 더욱 약화되어 여성의 역할이 더 강화된다. 여성의 가사돌봄노동시간이 증가할 수밖에 없다. 본인 역시 장시간 노동에 대한 압박을 받지만 더욱 악화된 돌봄분담 탓에 회사를 그만두는 결론으로 갈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일을 하지 않을 수는 없기에 시간제 등 더 낮은 일자리로 이동하게 된다.

이는 채용과정의 여성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구직자 본인이 실제 그러건 아니건 상관없이 여성을 장시간 노동을 감당하기 어려운 미래의 돌봄전담자로 간주한다. 남성에게는 묻지 않는 결혼, 남자친구, 출산(결남출)을 여성에게만 질문하고 결국 뽑지 않는 채용 성차별이 발생한다. 결국 장시간 노동은 노동시장 성차별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는다.  

장시간 노동은 자본의 이윤추구가 극대화된 결과이다. 이는 노동자가 시민이자 돌봄자이며 삶의 시간을 영위하는 다중정체성을 가진 인간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이다. 휴식시간조차 부여하지 않는 일하는 도구로, 기계로만 취급하는 후안무치다.

드라마 <세브란스 : 단절>에서는 일터의 시간과  삶의 시간을 분리하지만 현실의 한국 정부는 노동자 삶의 시간을, 회사 밖의 삶을 아예 삭제하려 하고 있다. 노동시간은 지금보다 더 길게가 아니라 전체적 노동시간을 줄여 노동자가 자신의 시간주권을 가질 수 있게 해야 한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한국여성노동자회 대표입니다.


태그:#성평등노동, #38여성대회, #세계여성의날, #한국여성대회
댓글1

1987년 창립된 한국여성단체연합은 지속가능한 성평등 사회를 만들고 여성인권을 보장하기 위해 연대를 이뤄나가는 전국 7개 지부, 28개 회원단체로 구성된 여성단체들의 연합체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