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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이동진과 김지운 악마를 보았다 인터뷰

ㅇㅇ(112.165) 2018.12.08 00:23:32
조회 5023 추천 36 댓글 16
														

-‘악마를 보았다’에 처음 착수하실 때의 마음가짐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을 끝으로 장르에서 어느 정도 탈피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장르 자체보다는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에 좀더 집중하려고 했죠. 두 캐릭터를 강렬하게 보여주고 인물의 내면에 좀더 몰두해야겠다는 의도로 출발한 거죠. 무엇보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이후 밀도 높은 영화를 만들고 싶었거든요. 그 결과가 ‘악마를 보았다’일 거에요.” 

-그런데 제겐 장르에 대한 ‘악마를 보았다’의 태도가 이중적으로 보입니다. 인물 묘사 방식에서 촬영이나 조명을 포함한 스타일까지, 말씀하신대로 장르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장르적 쾌감에 집착하는 것으로 보이는 부분들도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다는 거죠. 예를 들어 펜션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다룬 중반부 시퀀스가 특히 그런 것으로 보입니다. 장르적 표현을 경계하려는 이성과 장르에 대해 탐닉하는 본능이 곳곳에서 서로 충돌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할까요. 

“그런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며칠 전 인터뷰할 때까지만 해도 ‘장르를 걷어내고서 사실적으로 만들다 보니까 파장이 커졌다’고 제가 거듭 말했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게 아니었던 것 같다는 거죠. 제 머리에서 장르를 완전히 걷어내지 못했다는 것을 지금 느끼게 됩니다. 촬영장에서는 리얼리스트의 시선으로 냉정하고 드라이하게 찍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무의식 중에 고어 영화에 몰두한 부분이 있었더라고요. 어떻게 하면 지독한 복수극을 보여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대한 나의 반응이 고어 장르에 몰두하게 만든 것 같습니다. 그와 같은 불균질적인 측면이 어떤 분에겐 영화적 특성과 매력으로 다가가기도 하고, 그 반대로 여겨지기도 하는 듯해요.” 

-다른 장면들에 비해 장르적 느낌이 훨씬 강한 펜션 시퀀스는 영화 전체에서 그 자체로 상당히 튀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그 장면 전까지의 비교적 사실적인 톤과 배치된다고 할까요. 

“찍기 전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펜션 장면 전체를 빼야 할지를 놓고 고민했는데, 찍으면서도 고민이 그치지 않더군요. 50억원의 순제작비가 상당히 빡빡했는데, 그 부분은 세트를 지어 촬영했기에 제작비도 가장 많이 들어가는 시퀀스였거든요. 지적하신대로 불균질한 느낌이 강해서 저도 고민이 됐던 거죠.” 

-그런데도 넣기로 하신 건 어떤 이유 때문이었습니까. 

“그전까지 리얼하게 진행되어 오던 영화가 그 부분에서 판타지적으로 바뀌긴 하죠. 제가 고어적 취향에 몰두했다는 것을 어디서 느꼈냐고 하면, 바로 그 펜션 시퀀스를 넣기로 한 결정 자체에서였어요. 저는 이 영화에 수현(이병헌)이 병원에서 또다른 살인마의 입을 찢는 장면은 왠지 꼭 넣어야 할 것 같았거든요. 그 장면 찍을 때 장르적 탐닉 같은 게 있었던 거죠.” 

-그렇다면 입을 찢는 장면을 꼭 넣기 위해서라도 그 장면의 밑그림을 제공하는 펜션 시퀀스를 삭제해선 안 된다는 결정이었다는 얘기네요. 

“그렇죠. 영화의 흐름에 대해 스스로 의문이 들면 촬영 도중에라도 잠시 중지한 뒤 생각을 가다듬었어야 했는데, 워낙 상황이 촉박해 제가 중간에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측면이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 불균질하게 된 것 같아요.” 

-이 영화는 첫 장면에서부터 살인범이 누구인지를 알려줍니다. 그리고 범행동기도 이미 초반부터 더 이상 중요한 것이 아니게 되죠. 그리고 영화가 시작된 지 불과 40분만에 복수의 주체가 복수의 대상을 완벽히 제압합니다. 결국 ‘악마가 보았다’의 이야기에서 핵심은 수현이 살인마 경철을 잡은 뒤 놓아주는 과정을 반복한다는 설정일 것 같습니다. 고통을 가장 크게 안기기 위해서죠. 

“그렇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그 방법은 극중 잘못된 판단이었음이 드러납니다. 영화 속 이야기의 실제 흐름을 벗어나 생각해봐도, 고통의 극대치를 위해 잡은 상대를 놓아주고 다시 제압하는 과정을 반복한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지는 듯합니다. 만일 이 영화를 통해서 괴물과 싸우느라 괴물이 되어버린 남자의 이야기를 하면서 복수의 허망함이나 실존적 무력감을 말하려고 하셨다면 그 같은 영화의 핵심 설정이 걸림돌이 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다시 말해 복수라는 것이 허망하다는 메시지가 제대로 전달되려면, 복수의 방법 자체가 적절한 것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일이 어긋나야 하지 않을까요. 이 영화를 끝까지 다 보게 되면, 복수 자체가 허망한 것이고 인간 자체가 무력한 존재라기보다는, 주인공 수현이 그저 판단 미스를 범한 것으로 느껴지기까지 하거든요. 

“결과적으론 잘못된 방법이었지만 애초엔 합당하다고 수현이 생각했던 겁니다. 완벽한 방법이었다고 판단했는데 알고 보니 만만찮은 상대였다는 거니까요. 다만 결과가 잘못되어버린 것이지 자신이 복수하려는 의미와 내용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수현은 그동안 잔인한 사냥꾼처럼 행동했던 경철에게 ‘너도 벌벌 떠는 초식동물처럼 되어봐라’는 의미에서 놓아주는 거죠. 그전까지의 입장을 바꾸어놓은 뒤, 희생자가 느꼈던 공포를 느끼게 해주려는 게 수현의 목적이었던 겁니다.” 

-경철은 희생자에게 고통을 최대한 안기기 위한 방법으로 놓아주고 다시 잡는 방식을 반복하진 않습니다. 그런데 수현은 그렇게 하죠. 약혼자를 잃은 분노를 격렬하게 발산시키려는 사람이 맹획을 완전히 굴복시키기 위해 잡았다 놓아주는 것을 일곱번 반복하는 제갈공명처럼 행동한다는 것은 지나치게 인위적인 설정인 건 아닐까요. 그런 설정 때문에 이 영화의 이야기 자체가 일종의 게임처럼 다가오는데요. 

“수현은 약혼녀가 야수 같은 사냥꾼에게 포착된 먹잇감이 된 것으로 생각했을 거에요. 그랬기에 역으로 경철이 먹잇감의 입장이 되는 상황을 반복하면서 고통을 주려고 했던 거죠. 처음 잡혀서 당하고 났을 때 경철은 상대를 그저 ‘개싸이코’라고 치부합니다. 그러다 두번째는 ‘이건 대체 어떤 상황일까’ 생각하기 시작하죠. 잡았다가 놓아주는 방식을 반복함으로써, 한번도 그런 적 없었던 인간이 스스로가 먹잇감이 되어 살아가는 기분을 느끼게 해주려는 게 수현의 의도였을 거에요. 그 과정에서 점점 배가되는 공포를 느끼게 해주고 싶었던 것이고요. 이런 설정에는 영화적이고 장르적인 유희가 개입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다른 복수극에 비해 더 어필할 수도 있는 거죠. 제 의도 자체가 명확하게 보이지 않았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하겠지만, 수현의 의도나 복수 자체가 잘못된 출발이라는 지적은 수긍할 수 없습니다.” 

-‘악마를 보았다’에서 ‘결국 악마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짐승과 싸우다가 짐승이 되어버린 남자의 이야기’로 보면, 그 악마의 범주에는 경철뿐만 아니라 수현까지도 들어가게 되는 거죠. 그런데 그렇게 받아들이기엔 이 영화의 수현이 후반부에서조차 단지 복수의 방법이 잔인할 뿐, 일종의 ‘악마’가 되어가는 것으로 느껴지진 않습니다. 두 사람의 악마성 사이에서 균형이 맞지 않는다고 할까요. 수현의 악마성은 어떤 것일까요. 

“경철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악마성은 아니겠죠. 저는 수현의 마지막 처단 방법이 악마적이었다고 생각해요. 단지 경철 개인에 대한 복수에서 그치지 않고 그의 가족들까지 불러 죽음을 이끌어낸 것 자체가 악의 기운을 빈 응징이 아닌가 싶은 거죠. 수현은 끝까지 악마가 되진 못했지만 바로 그 순간에 악마와 결탁한 흔적이 있습니다. 경철의 가족을 불렀으니까요. 그러기 직전에 수현이 묶어놓은 경철에게 무섭냐고, 네가 한 짓을 알겠냐고 물어본 것은 사실 경철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구원하고 싶어서였을 거에요. 하지만 경철이 끝까지 대결 구도로 가니까 결국 경철의 가족들을 그렇게 부른 거죠. 마지막까지 나를 구원하지 못하는 네가 정말 악마구나, 그런 너를 상대했기에 나 역시 구원받을 수는 없는 것이구나, 그래서 마지막 저주를 퍼붓고 가는 것일 거에요.” 

-저는 이 영화의 결말 부분을 보면서 저게 과연 경철에게 가장 큰 고통을 안기는 복수 방법일지 의문스러웠는데요. 

“적절한 엔딩을 찾기 위해 정말 많이 고민했어요. 어떤 설정이 가장 공포스러울지를 생각하다가 광장의 공개 처형 방식까지도 생각했으니까요. 장소가 제대로 섭외되지 않는 바람에 그런 설정을 접었지만요. ‘악마를 보았다’를 고통분담극이라고 할 때, 수현 입장에선 자신의 고통을 경철에게 주는 게 목적이죠. 수현은 아마도 가족 앞에서의 죽음이 경철에게 가장 고통스러울 것이라고 판단했을 거에요. 가족 앞에서 죽는 걸 경철이 두려워하든 아니든, 그는 자신의 죽음을 가족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을 겁니다. 더 이상 육체적인 고통을 가하는 것이 의미 없는 상황에서, 심리적 고통을 주는 게 수현이 할 수 있는 방법이었을 거라고 봐요. 경철이 가장 원하지 않는 순간에 그를 죽이자는 거죠. 햄릿이 숙부가 기도할 때 죽이려다가 혹시 그렇게 하면 숙부가 천국에 갈까봐 포기하는 것과도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고 할까요.” 


-물론 창작에서 ‘어떻게’는 그 자체로 핵심적입니다. 하지만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처럼 황야에서 말 달리는 이야기라면 ‘어떻게’ 만으로도 큰 무리가 없을 수도 있지만, ‘악마를 보았다’처럼 끔찍한 살인과 신체 훼손이 반복되는 서사라면 ‘어떻게’ 만으론 부족하지 않을까요. 

“맞는 말입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왜’를 떠올리지 못했다면, 그건 이해가 안 된 거죠. 말하자면 저는 ‘왜’와 ‘무엇’을 넣지 않은 채 ‘언제’와 ‘어떻게’를 통해 ‘왜’를 떠올리게 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렇기에 이 영화를 이해한 사람들은 ‘왜’와 ‘무엇’에 대해 심정적으로 이해가 됐다고 보는 겁니다. 감정적으로 수현을 이해할 수 없다면 ‘왜’가 빠져버리게 될 거에요. 그런데 똑 같은 영화를 보고서 어떤 사람은 ‘왜’라는 해답을 찾는데, 또 어떤 사람은 찾지 못한다면 그건 왜 그런 거죠?” 

-그건 그 사람의 이해력이 떨어져서일 수도 있겠죠. 그런데 사실 저는 세상에 ‘왜’가 없는 영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악마를 보았다’ 역시 ‘왜’가 없다고 보지 않습니다. 다만 이 영화가 전달하고 싶어하는 ‘왜’는 장르적인 쾌락과 표현들 속에서 훼손되었다는 것이죠. 마지막에 가서 복수의 허망함과 인간 존재의 무력함을 전달하려고 하지만, 이미 그 직전까지 이 영화는 폭력과 잔혹의 스펙터클을 너무 많이 즐겼으니까요. 저는 잔혹하고 폭력적인 장면에 반대하는 게 아닙니다. 다만 그런 부분들에 대해 넘쳐나는 직접적 묘사들과 이 영화가 표방하는 주제가 서로 충돌하고 있다는 거죠. 폭력도 폭력이지만, 저는 이 영화의 섹스신이 지닌 함의 역시 위험할 수 있다고 보는 쪽이기도 하고요. 

“많은 분들이 불편하게 여기는 장면이 강간이 화간으로 바뀌는 것 같은 펜션에서의 섹스신인 듯합니다. 그런데 세정이란 이름의 그 여인은 원래 경철의 옛 애인으로 설정되어 있었어요. 애초엔 경철에게 그동안 나 안 보고 싶었냐고 묻는 장면도 있었죠. 그런데 3번째로 심의를 넣는 과정에서 그런 묘사들을 포함하고 있는 펜션의 인육 관련 부분 대화 장면이 대부분 삭제될 수밖에 없었죠. 그러다 보니 세정이 관객들에게 경철 친구의 부인처럼 여겨지게 된 거에요. ‘이것들이 돌려가면서 나를 놀리네’라는 여자의 말도 사실은 두 사람의 이전 관계를 암시하는 말인데, 그 전의 장면들이 삭제되다 보니 오해의 여지가 생긴 거죠.”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그런데 그 대목뿐만 아니라 경철이 성폭행을 하려는 장면들에 대해서도 저는 의문이 있습니다. 펜션 장면 전까지 이 영화에서 경철은 모두 4명의 여성 희생자를 상대합니다. 그런데 이중 성폭행 시도 모습이 묘사되는 것은 뒤의 2명, 다시 말해 여고생과 제복을 입은 간호사입니다. 극 초반의 20대 여성 두 명에 대한 성폭행 묘사를 생략한 반면, 왜 여고생과 간호사는 묘사하기로 결정하셨는지 궁금합니다. 더구나 그런 장면을 부감이나 인서트 등으로 다뤄낸 자극적 촬영 방식도 관객에 따라선 저항감을 느낄 수가 있을 것 같은데요. 

“경철은 성폭행보다는 살인 자체를 즐기는 사람인 것 같아요. 성적인 환상보다는 살인의 환상이 더 큰 사람이었기에 처음 두 사람에겐 그럴 필요가 없었던 듯해요. 살인이 동기니까요. 그런데 세번째인 여고생의 경우, 극중 대사처럼 경철이 정말로 그 여고생을 사랑했었을 수도 있었을 것 같아요. 처음엔 자신의 진심을 알아달라고 접근했는데 그게 시간적으로 늘어지는 상황에서 어느 순간 학원 버스를 몰지 못하는 상황까지 오게 되니까, 평소에 봐두었던 그 아이에게 막장스럽게 행동하게 되는 게 아니었을까 생각해요. 네번째인 간호사의 경우는 세번째의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이죠. 수현 때문에 그 전에 하지 못하고 말았으니까 이번에 한다는 단순한 생각이었을 거에요. 그런 면에서 살인마들이 가진 공통점으로 성적인 위협을 드러내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고요. 영화적으로 보면 서스펜스가 중요한 상황에서 위험한 순간에 주인공이 구출하러 나타나야 하니까, 그 직전까지의 긴장을 고조시키기 위해 그런 묘사를 하는 것이기도 하죠. 여자에게 가장 위협적인 타이밍에 수현을 등장시키는 게 더 적합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던 겁니다. 그러다 보니 관객 분들에 따라선 불편하게 느끼시는 건데, 그랬다면 제가 받아들여야 하는 부분일 거에요.” 

-저는 ‘왜’를 물었는데 감독님은 ‘효과’에 대해 계속 답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다시 받자면, 저는 그런 장면들이 좋은 효과를 가진 나쁜 설정이 아니냐는 거죠. 

“어쨌든 원작에 있는 걸 제가 크게 바꾼 것은 아니니까요. 인간의 어두운 욕망을 불필요하게 강조하거나 그 순간을 너무 고통스럽게 그렸을 수는 있겠죠. 하지만 그런 설정 자체는 있을 수 있잖아요. 조금 전에 말했던 것처럼 관객이 안심할 수 있는 드라마적 순간에 주인공이 뛰어들어가 처리하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정도인 듯해요. 그런 장면엔 남자들의 어두운 판타지가 들어가 있을 텐데, 더 불편해지기 전에 영화적으로 처리해주는 것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일 거에요. 하필이면 여고생과 제복 입은 여성을 대상으로 해서 그랬던 것 같은데, 그 두 역을 맡은 연기자들이 순수하고 착하게 생겼기에 불편함이 더 커졌을 것 같기도 해요. 저는 분명히 그런 마스크의 배우를 원했던 것인데, 아마도 그걸 고어의 한 경향처럼 생각했던 듯해요.” 

-김지운 감독님의 ‘악마를 보았다’를 보면서 박찬욱 감독님의 영화들을 떠올린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 역시 적잖은 장면들에서 그랬습니다. 우선 펜션 신의 첫 쇼트에서 저는 정말로 김옥빈씨가 출연한 것으로 착각했습니다. 김인서씨가 연기한 세정이란 인물은 헤어 스타일과 의상까지 ‘박쥐’의 김옥빈씨를 그대로 떠올리게 했으니까요. 게다가 경철의 살인마 친구로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인 태주는 ‘박쥐’에서 김옥빈씨가 연기한 캐릭터의 이름과 동일하잖습니까. 

“아, ‘박쥐’에서 김옥빈씨 캐릭터 이름도 태주였군요.” 

-이런 부분들은 의식적인 차용입니까. 

“전혀 의식하지 못했어요. 박훈정 작가가 썼던 원래 시나리오에선 그 장면에서 경철의 친구가 한 명만 나오는 설정이었는데, 그 친구 이름이 세주였죠. 그런데 남자와 여자 캐릭터 두 명이 나오는 것으로 각색하는 과정에서 그 이름을 둘로 나눠 각각 태주와 세정으로 지은 것일 뿐이에요. 그리고 스타일리스트가 보기에 얼굴이 작은 김인서씨는 그 의상과 헤어 스타일이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했던 것 같아요. 그게 ‘박쥐’의 김옥빈씨를 떠올리게 할 줄은 몰랐습니다.” 

-그 외에도 많습니다. 펜션에서의 섹스신은 식탁 앞에서의 체위가 ‘친절한 금자씨’를 연상케 하는데 남자 배우가 최민식씨라는 점까지 같습니다. 두 영화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유족의 사적인 복수를 다뤘다는 점에서도 공통점이 있죠. 두 살인마가 과거에 무장 혁명단체 소속이었다는 얘기와 아킬레스 건을 자르는 장면은 ‘복수는 나의 것’과 동일합니다. 극 초반 천사 날개가 등장한다는 점과 일단 잡았다가 놓아주는 게 스토리의 핵심이라는 것은 ‘올드보이’와 같고요. 

“펜션 섹스신을 후배위 체위로 한 것은 그게 가장 동물적이고 파괴적인 자세라서였습니다. 무장혁명단체의 경우 저는 오히려 ‘넘버 3’의 불사파를 떠올렸습니다. 원래는 대사가 더 길었어요. ‘우리 예전에 산에서 합숙도 하고 그랬잖아. 등산객에게 칼도 던지고. 그때가 좋았어’란 대사도 있었죠. 불사파의 모델은 지존파였잖아요? 살인집단이 신체단련도 하고 그랬던 건데, 저는 경철과 태주의 대화를 통해 그들을 연상시키려고 그랬던 거에요.” 

-지존파는 경철과 태주처럼 세상을 전복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지 않나요. 

“아니에요. 지존파도 세상을 뒤집어 놓으려는 게 시작이었어요. 경철이 모는 학원버스 룸미러에 붙였던 천사 날개는 너무 작위적인 상징이어서 뗄까 하다가 일단 붙여놓아보라고 했었죠. 저는 일단 뭔가 해놓고 거북하게 느껴지면 없애는 스타일이거든요. 그런데 이 영화 첫 장면에서 그게 날개가 아니라 악마의 눈처럼 보이는 거에요. 더구나 처음엔 그게 포커스 아웃되어 뿌옇게 표현되니까요. 그러다 장면이 진행됨에 따라 초점이 거기에 맞춰지면 ‘아, 저건 천사의 날개였구나’ 라고 생각하게 만들고 싶었던 거죠. 그처럼 전도된 이미지가 재미있어서 그렇게 했던 겁니다.” 

-그러면 ‘악마를 보았다’와 박찬욱 감독의 작품들 사이의 이 많은 공통점들은 우연이라는 말씀이네요. 이 영화를 본 수많은 관객들이 박찬욱 감독님의 영화들을 떠올렸는데, 정작 김지운 감독님은 그걸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는 게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무의식의 결과라면 저도 어쩔 수 없겠지만, 저는 이전 작품들에서 패러디와 오마주를 하는 경우엔 분명히 밝혀왔었어요. 그런데 이번 영화는 그런 걸 밝힌 적이 없었죠. 조금 전에 말했던 것처럼 그 장면들은 다 각기 다른 이유와 상황이 있었으니까요. 복수극이라는 것 때문에 비교될 수도 있겠다는 정도는 사전에 생각했고, 사람들이 ‘올드보이’에서의 최민식씨를 떠올릴 수도 있을 거라는 예측은 했지만, 그런 것들에 신경 쓴다면 이 영화를 못 만들었겠죠. 말씀하시는 장면들에 대해서는 지금 제가 들어봐도 공통점이 재미있을 정도인데, 어쨌든 분명한 사실은 이 영화를 만들면서 저뿐만 아니라 주변의 누구도 그런 것들에 대해서 지적한 사람이 없었다는 거에요. 저도 신기하네요.” 

-이 영화의 최민식씨를 보면 그 탁월한 연기에도 불구하고 ‘올드보이’의 오대수와 ‘친절한 금자씨’의 백선생 캐릭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같은 배우를 비슷한 맥락의 캐릭터로 쓰는 것에 대해서 부담은 없으셨나요. 

“그런 생각은 안 했어요. 저는 한국 영화 중 가장 섹시한 작품을 ‘친절한 금자씨’라고 생각하고 가장 서사가 강한 작품을 ‘올드 보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인데, 그런 것들을 겁내거나 의식한다면 이 작업을 못했을 거에요. 설혹 내가 ‘올드 보이’를 리메이크해도 그건 박찬욱 감독의 ‘올드 보이’와는 다른 거잖아요. 기를 쓰고 똑같이 하려고 해도 다르게 나오기 마련인데, 그런 걸 겁낼 필요는 없을 거에요.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만 충실히 생각하면 되는 거죠.” 

-저는 개인적으로 김지운 감독님의 작품들 중 ‘반칙왕’과 ‘달콤한 인생’을 정말 좋아합니다. 저처럼 감독님이 그런 영화를 다시 만들어주길 바라는 관객들이 있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오랫동안 곱씹어온 화두에 대해 매작품 풀어내는 사람이 아니에요. 매번 다른 미션이 떨어지면 그걸 놓고 고민하는 사람이죠. ‘악마를 보았다’는 그 영화에 맞는 고민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그 영화에 맞는 해결 방식을 찾았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은 시청각적 쾌감과 화려함에 비해 밀도가 낮았다는 스스로의 판단 때문에 이번엔 무엇보다 밀도 높은 영화를 하고 싶었던 거죠. 제가 고어적인 것에 계속 취미가 있는 사람인 것은 아니에요. 저도 ‘달콤한 인생’이나 ‘반칙왕’이나 ‘장화, 홍련’ 때의 영화를 무척 하고 싶어요. 모든 사람들이 즐겁게 볼 수 있는 영화라고 할까요. 이제 ‘악마를 보았다’ 같은 영화를 했으니까 ‘반칙왕’에 가까운 가벼운 영화를 해보고 싶은 생각도 있어요. 어쨌든 제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누아르 스타일의 영화인 듯합니다. 그게 고어 누아르인지, 네오 누아르인지, 펄프 누아르인지, 액션 누아르인지는 모르겠지만요. 직전에 만들었던 작품 이후에 생긴 미션을 풀기 위한 해결책을 내놓은 이번 영화처럼, 다음엔 또다른 미션이 주어지겠죠. 저는 그게 무엇이든 거기에 충실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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