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만9000원 내고 나무 보러 간다고?… 자연·건축 어우러진 ‘사색의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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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2.06.16. 오후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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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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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군위군의 ‘사유원’을 대표하는 건축물인 ‘소요헌’. 포르투갈의 세계적인 건축거장 알바로 시자의 작품으로 피카소의 걸작 ‘게르니카’를 전시하기 위해 설계한 ‘아트 파빌리온’이다. 본래 스페인 마드리드에 지으려 했으나 건축이 취소돼 설계도로만 남아 있다가, 사유원에 세워졌다. Y자 형태의 건물이 땅으로 스미는 듯 낮고 겸손하다.


■ 위안과 풍류가 있는 수목원 군위 ‘사유원’

놀이공원도 아니고 공연·전시도 없는 ‘휴식·명상의 공간’

디너 패키지는 21만9000원… 4인가족 가면 100만원 육박

高價 입장료 논쟁 불구 33년간 들인 노고·돈·정성 놀랄만

입장객도 하루 200명 제한…귀하게 보고 가라는 전략인듯

대구 태창철강 회장이 조성…본사 건물도 미술관 방불

日 밀반출 모과나무 4그루 사들여 군위 야산에 심으며 시작

세계적 건축가 알바로 시자가 ‘소요헌’ 등 3개 건물 설계

승효상도 동참…수목에 건축이 스며드는 공간으로 가꿔


군위(경북)=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경북 군위군 부계면에 ‘사유원’이 있다. 여기를 어떤 곳이라고 해야 할까. 법적으로는 ‘수목원’이지만, 실제 내용으로 보면 수목원은 아니다. 다양한 나무와 꽃, 식물이 있지만 그게 주인공은 아니다. 이름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사유’(思惟). 사전적인 뜻은 ‘대상을 두루 생각하는 일’이다. 공간의 형태나 특징이 아니라, ‘관람하는 사람의 상태’를 이름으로 내걸었다. 주인보다 손님에게서, ‘보여 주는 이’보다 ‘누리는 이’에게서 이름을 찾은 셈이다. 자연과 어우러진 건축의 공간에서 휴식하고 명상할 수 있는 곳. 그곳이 사유원이다. 본격적으로 사유원 얘기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입장료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사유원 입장료는 5만 원이다. 주말에는 6만9000원으로 오른다. 놀이공원처럼 탈 게 있다거나, 공연이나 전시 관람이 포함된 가격도 아니다. 그냥 입장해서 나무와 꽃을 보고 시설을 관람하는 비용이 그렇다. 사유원 관람과 레스토랑에서의 스테이크 저녁 식사를 엮은 패키지도 있다. 평일은 20만 원, 주말에는 21만9000원을 받는다.

# 수목원 입장료가 6만9000원이라고

사유원의 비싼 입장료는 논쟁적이다. 과연 그 돈을 주고 가 볼 가치가 있는가에 대한 생각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흔쾌히 다녀와서 만족하는 사람도 있겠고, 후회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비쌀수록 잘 팔린다’는 명품소비를 설명하는 이론인 ‘베블런 효과’의 전략으로 보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베블런 효과는 미국 경제학자 소스타인 베블런의 책 ‘유한계급론’에서 비롯한다. 책에는 ‘과시소비’와 ‘과시여가’란 개념이 나온다. 베블런은 돈 많고 시간 많은 유한계급이 지불 능력을 끊임없이 과시하는 행동을 ‘과시소비’로, 쓸모없는 일에 시간을 소비하며 노동으로부터 면제됐음을 과시하는 것을 ‘과시여가’로 규정했다. 단도직입적인 질문. 그렇다면 사유원은 과연 ‘과시여가’의 공간인가.

위 사진은 소요헌의 내부. 천장을 뚫고 들어온 철구조물이 전쟁과 폭력을 상징한다. 사진 아래 왼쪽은 승효상 건축가가 설계한 명상공간인 ‘명정’(瞑庭) 내부. 해의 기울기에 따라 긴 회랑에 스미는 빛이 다양하게 변주된다. 오른쪽은 새들이 주인인 건축물 ‘조사’(鳥寺). 새를 불러 모으다가 썩어 넘어져서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건축물로 역시 승효상의 작품이다.


# ‘아무나 받지 않겠다’는 자존심일까

사유원의 비싼 입장료를 두고 ‘가격전략의 문제’를 제기할 수는 있겠지만, 터무니없다거나 탐욕스럽다고 몰아붙일 수는 없다. 공간 조성에 들인 노고와 ‘들인 돈’만 따져 봐도 그렇다.

2006년 경북 군위군에 66만㎡(약 20만 평)가 넘는 땅을 사서 1980년대부터 사 모은 수백 년 된 노거수 수백 그루를 옮겨 심었고, 내로라하는 세계적인 건축가들에게 의뢰해 자연과 어우러지는 다양한 건축물을 지었으며, 장인(匠人)으로 불리는 한국과 일본의 조경전문가가 풀과 나무, 돌과 물의 위치를 정했다. 그렇게 차곡차곡 만든 공간을 15년 넘게 가꿨다. 오랜 시간과 적잖은 돈, 가늠하기 어려운 정성을 쏟아부은 것이다.

입장료로 조성 비용은커녕 이 넓은 공간을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을 대기에도 벅차 보였던 건, 사유원이 관람객 숫자를 ‘하루 200명’으로 제한하고 있어서다. 예약 손님만 받는 사유원은 하루 입장 인원을 현재 200명까지로 제한하고 있다. 평일에는 입장제한 인원을 넘기는 날이 많지 않지만, 관람객이 몰리는 주말이나 휴일에는 예약을 안 했다거나, 입장 인원을 초과했다는 이유로 발길을 돌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공간이 워낙 넓어서 200명쯤의 인원으로는 휑해 보이는데도 말이다.

경영적 시선으로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수익을 위해서라면 입장료를 좀 내리고 입장 정원을 늘리는 편이 낫지 않은가. 사유원은 입장료를 비싸게 받고, 관람 인원을 제한하고 있는 이유를 ‘쾌적한 관람 여건을 조성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그것보다 이런 짐작이 더 설득력 있다. 사유원은 ‘아무 때나 가는 곳’이 되고 싶지 않은 게 아닐까. 10년 넘게 돌 하나하나 놓는 자리까지 고심하며 정성을 다해 만들어 놓은 공간이니, 그만큼 귀하게 보고 가라는 뜻이 아닐까. ‘아무나 받지 않겠다’는 자존심. 최소한 예약을 통해 사전 준비를 한 사람에게만 문을 열어 주겠다는 의지. 비싼 입장료를 낸 만큼 오래 머물며 속속들이 보고 가도록 하겠다는 전략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그렇다면 전략은 어느 정도 성공한 듯 보였다. 사유원 입장객 대부분은 오전 10시를 전후해 입장을 마쳤다. 비싼 입장료의 ‘본전 생각’ 때문이리라. 일찍 입장한 관람객들은 저마다 지도를 꺼내 들고 늦은 오후까지 사유원 구석구석을 천천히 둘러봤다.

아무도 바삐 움직이지 않았다. 장쾌한 전망 앞에서 심호흡하고, 건축이 만들어 낸 낯선 풍경에 감탄하고, 곳곳에 매달아 놓은 금언과 같은 글을 읽었다. 분명한 건, 아무도 으쓱해하지도 과시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 자연과 건축의 애정으로 지은 곳

사유원은 누가, 어떤 이유로, 무엇을 위해서 만든 공간일까. 사유원 설립자는 대구에 본사를 둔 태창철강의 유재성 회장이다. 태창철강은 철강 자재 유통·가공업을 하는 향토기업. 창립일이 해방 이듬해인 1946년까지로 거슬러 올라가는 대구를 대표하는 중견기업이지만, 소비재에는 손을 대지 않으니 일반 소비자들에게는 낯설다.

철강회사는 본업과는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수목원을 왜 만들었을까. 적잖은 돈과 시간을 바쳐서 말이다. 그 단서가 대구 성서공단의 태창철강 본사 건물에 있다. 사선과 직선 그리고 곡선이 어우러진 조형미 넘치는 태창철강 본사 사옥은 회사 건물이 아니라 마치 미술관처럼 느껴진다.

대구경북건축가회장을 지낸 향토 건축가 박종석이 설계한 사옥은 밤 풍경이 더 인상적이다. 야간조명이 켜지면 외벽에 은하수 같은 별빛이 새겨진다. 파리 에펠탑과 개선문 조명디자인을 맡았던 프랑스의 얀 케르샬레의 작품이다. 지방 도시 공단의 철강회사가, 방콕공항과 시카고공항 조명프로젝트를 진행했고 덴마크 코펜하겐 콘서트홀의 조명을 설계한 세계적인 조명예술가의 작품으로 사옥을 장식한 것이다.

태창철강 본사 사옥 앞에는 1500평 규모의 한국식 정원도 있다. 정원에서는 모과나무와 소나무, 배롱나무, 산수유나무, 팽나무 등 다양한 나무들이 자란다. 사옥 1층과 지하에는 300석 규모의 소극장도 있다. 사옥 건축과 정원 조성에서 드러나는 건 유 회장의 건축과 자연 그리고 예술에 대한 깊은 애정과 지극한 관심이다. 사유원을 지탱하고 있는 가장 든든한 토대가 바로 이것이다.

알려지기로 사유원의 시작은 ‘모과나무’였다. 유 회장은 정원사의 귀띔으로 일본으로 밀반출되는 300년 남짓 수령의 모과나무 4그루를 부산항의 컨테이너에서 목격했다. 팔려 가는 늙은 나무가 해외로 입양 가는 고아처럼 느껴졌던 것일까. 유 회장은 일본인이 치르기로 한 나무값 2000만 원에다 웃돈을 얹어 모과나무를 사들였다.

이게 소문이 나자 노거수를 팔겠다는 사람들이 찾아왔다. 유 회장이 이후에도 줄곧 나무를 사들이게 된 계기다. 이 나무 한 그루 한 그루가 수목원의 꿈을 품은 씨앗이 됐다. 모과나무를 처음 산 게 1989년의 일이니 수목원의 씨앗은 33년 전에 뿌려진 셈이다.

연못 위에 코르텐강(鋼)으로 지은 ‘와사’(臥寺)의 내부. 둥근 구멍으로 들어온 빛이 벽에 무늬가 돼 찍힌다.


# 사유원의 첫 번째 주인은 건축물

사유원의 주인공은 건축물이다. 건축가가 설계한 수목원은 자연마저 지극히 건축적이다. 자연경관까지도 건축 설계 방식으로 관람객의 시선을 분석하고 해독해 재구성해 낸다. 사유원에는 내로라하는 건축가들의 작품이 곳곳에 숨어 있다.

건축가의 명성만으로 본다면, 가장 먼저 눈길이 가는 건 건축계의 노벨상이라는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포르투갈의 세계적인 건축가 알바로 시자의 건축물이다. 사유원에는 시자가 설계한 ‘소요헌’(逍遙軒)과 ‘소대’(巢臺), ‘내심낙원’(內心樂園) 등 3개의 건축물이 있다.소요헌이란 이름은 사유원 설립자인 유 회장이 장자의 ‘소요유’에서 이름을 따서 붙여 준 것. ‘우주와 하나가 돼서 평안하게 노닌다’는 의미다.

본래 이 건축물은 피카소의 그림 게르니카를 전시하기 위해 스페인 마드리드에 지어질 ‘피카소 박물관’으로 설계된 건물 ‘아트 파빌리온’이었다. 설계는 완성했지만 게르니카 유치에 실패하면서 건축은 취소됐다.

이런 와중에 유 회장이 사유원에 건축물을 지을 세계적인 건축가를 물색하다가 설계도로만 남아 있게 된 시자의 아트 파빌리온을 알게 됐고, 끈질긴 설득 끝에 추가 설계작업을 거쳐 마드리드가 아닌, 한국의 군위군 땅에 건축물을 짓게 됐다는 얘기다.

소요헌은 긴 상자처럼 생긴 콘크리트 구조물을 Y자 모양으로 연결한 건축물이다. 사유원의 건물이 대부분 그렇듯 어떤 기능도, 장식도 없다. 두 갈래로 갈리는 소요헌의 Y자 한쪽 끝에는 지붕을 뚫고 떨어지는 철제구조물이 있다. 폭력과 전쟁을 형상화한 공간이다. 다른 한쪽 끝에는 생명의 탄생과 희망을 상징하는 커다란 알 모양의 조형물을 설치했다.

소요헌은 전쟁의 폭력과 참상 그리고 그 너머의 희망을 말하고 있다. 상자 같은 공간이 주는 독특한 공간감과 빛이 그려 내는 느낌만으로도 소요헌은 충분히 인상적이었다.

소요헌 아래에는 역시 시자가 설계한 전망대 ‘소대’가 있다. 소대란 이름은 ‘새 둥지 전망대’라는 뜻. 여기는 시자가 ‘소요헌을 한눈에 전망할 수 있는 곳을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사유원에 요구해 지은 경우다. 20m 높이의 전망대는 앞으로 15도쯤 기울어져 있는데, 전망대 끝에 오르면 수목원의 전경과 함께 사유원을 조망할 수 있다.

사유원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시자의 ‘내심낙원’은 현해탄에서 윤심덕과 동반 투신한 김우진의 동생, 김익진을 추모하는 자그마한 경당이다. 김익진이 번역한 가톨릭 서적의 제목 ‘내심낙원’을 그대로 건물 이름으로 가져왔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을 소작농들에게 다 나눠 주고 가톨릭에 귀의해 청빈한 삶을 살다가 세상을 뜬 김익진은, 사유원 설립자 유 회장의 장인이다.

# ‘드러내지 않는 건축’의 겸손함

사유원의 건축적 키워드를 다듬은 건 건축가 승효상이다. 유 회장이 공간적 개념을 정하자 승효상은 사유원의 설계와 건축에 이르기까지 곳곳에 생각과 손을 보탰다. 승효상이 사유원에 지은 건축물은 굵직한 것만 모두 다섯 개. 이 외에 정문과 각기 다른 형태의 생태화장실, 전망대, 벤치, 조명 등 수목원 부대시설을 세심하게 디자인했으며, 사유원 곳곳에 있는 여러 곳의 전망공간을 설계했다.

승효상이 사유원에서 풀어낸 건축물에는 공통된 특징이 있다. 그의 작업 노트를 보자. “수목의 풍경이 주가 돼야 하는 장소이므로 건축은 특별한 형태가 되지 않아야 했다. 그저 집 지을 장소만 잘 선택하면 그 주변 풍경을 잘 감상하는 시설로 족한 일이라 건축은 되도록 드러내지 않으려 했다.” 그가 사유원에 지은 건축물들이 한결같이 존재감을 과시하지 않고 땅에 낮게 스며든 이유다.

승효상이 사유원에서 가장 먼저 지은 것이 소나무 숲속 한가운데 앉힌 집 ‘현암’(玄庵)이다. 현암은 ‘오묘하고 아름다운 집’이라는 뜻. 장식이나 꾸밈없이 가장 단순한 형태로 짓되 삼면을 모두 이른바 ‘베젤’이 없는 통창으로 마감해 거대한 자연 풍경의 장쾌한 파노라마를 실내로 끌어들였다. 아쉽게도 건물 내부를 개방하지는 않지만, 먼발치에서도 소박하고 단정한 건축물이 초록의 숲과 어우러져 빚어내는 미감이 돋보였다.

두 번째로 지은 것이 수목원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명정’(瞑庭)이다. 명정은 지하로 파 내려간 건축물이다. 회랑을 만들고, 물을 가두고, 벽의 질감을 다듬고, 시간에 따른 빛을 계산해 경건한 느낌의 공간을 빚어냈다.

본래 사유원 측에서는 이 자리를 딱 짚어서 ‘전망대를 지어 달라’고 의뢰했는데, 승효상은 높이 오르는 대신, 관람객을 땅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더 높이 더 멀리 보는 전망대가 아니라, 수목원 관람 동선의 마지막쯤에서 지금까지 봐 온 경관을 다시 되새김하는 성찰의 공간으로서의 전망대를 구현한 것이다.

철제 박스를 이어붙여 만든 와사의 전체적인 모습. 연못 주위의 훤칠한 미루나무가 인상적이다.


# 쓸모 대신 공간의 본질에 몰두하다

승효상의 다른 건축물도 어느 것 하나 예사롭게 봐 넘길 것이 없다. 공연장 겸 레스토랑으로 산중 연못 곁에 지은 ‘사담’(思潭)은 그윽하면서도 절묘한 공간감이 탄성을 자아내는 곳이다.

계곡의 연못 ‘오당’(悟塘) 주변에 세운 ‘와사’(臥寺)는 붉게 녹이 슨 듯한 코르텐강(鋼) 철제 박스를 세 개의 연못을 가로지르도록 비뚤배뚤 이어 붙여 만들어 낸 공간. 구조물 천장과 벽면에 뚫린 크고 작은 동그라미 구멍으로 스며든 빛이 해의 기울기에 따라 움직이며 바닥과 벽에 문양을 새겨 놓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느티나무 숲 가장자리에 대나무로 높이 세워 지은 ‘조사’(鳥寺)는 ‘새들의 수도원’이란 이름 뜻 그대로 새를 위한 건축물이다. 비무장지대(DMZ)의 설치미술 프로젝트로 기획된 작품으로, 세월이 지나면 썩어 넘어져 자연으로 되돌아가도록 의도해 만들었다. 심지어 화장실인 ‘측간’도, 방향을 틀어 타인의 시선으로부터는 감추되, 사용자들이 사유원 전경을 가득 눈에 담으며 볼일을 볼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 냈다.

원오원아키텍츠의 최욱 건축가는 사유원 정상 쪽에 팔공산 비로봉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사색에 잠길 수 있는 북카페 ‘가가빈빈’(嘉嘉彬彬)을 지었다.

건축가뿐만 아니다. 국내 최고의 조경가로 꼽히는 정영선이 사유원 조성 초기에 전체적인 경관을 다듬었고, 조경의 장인으로 대접받는 일본 조경가 가와기시 미쓰노부는 계류와 정원에 돌을 놓았으며, 정영선 밑에서 일하던 조경사 박승진이 사유원 작업을 마무리했다.

사유원 건축이 특별하게 느껴지는 건 대부분이 ‘쓸모’를 염두에 두지 않은 것들이기 때문인 듯했다. 기능이나 용도를 정하지 않았으니, 규칙과 제약도 사라졌다. 스스로 오브제가 된 건축물은 존재 자체가 목적이 됐고, 건축가는 비로소 마음껏 ‘공간의 본질’에 집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 공간의 풍류를 시(詩)로 매달아 놓다

사유원을 수목원으로 해석한다면 중심은 수령 300년이 넘는 모과나무 108그루를 심어 놓은 공간이다. 장벽 같은 콘크리트 벽 너머 연못 뒤 구릉 주위로 늙은 모과나무들이 서 있다.

좁은 회랑 같은 통로로 돌아 들어가면, 갑자기 시야가 탁 트이면서 더러는 서고, 더러는 앉아 있는 듯한 모과나무 군락을 마주하게 된다. ‘아’ 하는 탄성이 저절로 나온다. 흉터처럼 울퉁불퉁한 수피(樹皮)의 모과나무 노거수가 당당하게 늘어서서 뿜어내는 오라가 대단하다. 모과나무 둥치 아래에는 코르텐강 구조물을 분재의 수반처럼 덧대 놓았는데, 늙은 나무의 흉터처럼 울퉁불퉁한 수피와 붉게 녹슨 쇠의 이질적인 질감이 이렇게 잘 어울릴 수 없다. 이 공간에 붙여진 이름이 ‘풍설기천년’(風雪幾千年)이다. 뜻을 풀면 ‘고난의 풍파, 그 몇천 년인가’다.

사유원에는 곳곳에 한자가 있다. 정원의 경관마다, 건축의 공간마다 한자로 이름이 붙여졌다. 심지어 철제 벤치에도 ‘고요히 머물며 마음을 비우는 곳’이란 뜻의 ‘좌망심제’(座忘心齊)란 한자를 박아 놓았다. 한자는 지어 붙인 이름이기도 하고, 경관을 보는 감상이기도 하며, 때로는 한 줄짜리 시(詩)이기도 하다. 그래서 한자의 뜻을 새기고 나면 사유원의 풍류와 운치를 훨씬 더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배롱나무 정원은 ‘별유동천’(別有洞天·별천지의 다른 세상)이고, 느티나무 정원은 ‘한유시경’(閑遊詩境·한가로이 거닐면 시인의 경지에 이른다)이며, 정문은 ‘치허문’(致虛門·극도의 비움에 이르러 평온을 지키다)이다.

이런 이름은 모두 설립자인 유 회장이 시문을 짓듯 지어 붙인 것이다. 이렇게 지은 한자 이름 하나하나가 힘차면서도 날아갈 듯한 필치의 글씨로 새겨졌다. 글씨는 중국의 서예가 웨이량(魏良)의 솜씨. 공간 이름이 하나하나 지어질 때마다 중국 시안(西安)을 오가며 받아 온 글씨들이다. 사유원은 오랜 풍상을 이겨 낸 나무와 몸을 낮춘 건축물의 변주로 만들어 내는 고요한 사색의 공간이다. 사유원에서는 자연이 위안이 되고, 이름이 정취와 풍류를 보태며, 건축이 시선과 생각을 이끈다.

군위에서 구태여 다른 여행 목적지 이야기를 덧붙이지 않기로 했던 건, 여기 한 곳만을 목적지 삼아 떠난다 해도,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여행이 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 사유원에서의 사유

사유원을 다 둘러보고 나면 질문 두 가지가 숙제처럼 남는다. 하나는 ‘쓸모’의 의무를 버린 건축물의 당위.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애초에 다른 곳을 위해 설계됐다가 이곳으로 이식된 건축물의 존재가치다. 건축물이 드러내는 게 땅의 역사와 정체성이라면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혹은 비무장지대(DMZ)에서 이곳으로 이식된 건축물을 과연 어떻게 해독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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