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칼럼

유전자 변이가 동아시아인을 만들었다!

[일러스트가 있는 과학에세이] 일러스트가 있는 과학에세이 17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했던 지인에게 들은 얘기다. 실험실에 흑인이 한 명 있었는데 피부가 워낙 탄력 있어 보여 어느 날 실례를 무릅쓰고 “한번 만져봐도 되냐?”고 양해를 구했다고 한다. 팔뚝이 정말 보들보들한 게 한국사람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감촉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한번은 아이를 데리고 갔는데, 그 흑인이 아이 머리카락을 한번 만져볼 수 없냐고 했단다. 곱슬머리가 안으로 파고드는 흑인의 머리카락과는 달리 굵고 검은 직모가 찰랑거리는 동양 아이의 모습이 너무 신기했던 것이다.

요즘이야 워낙 퍼머도 많이 하고 염색도 하고, 지나친 스트레스 때문인지 식습관 서구화 때문인지 탈모를 호소하는 사람도 많아(탈모의 전조는 머리카락이 얇아지는 것이다) 동아시아인 특유의 ‘삼단 같은’ 머릿결을 지닌 사람이 지나가면 우리도 한번 돌아보지만 아무튼 백인이나 흑인과 우리의 머리카락은 확연히 구분이 간다.

ⓒ강석기


동아시아인이 특유의 머릿결을 갖게 만든 유전자 후보가 수년 전 밝혀졌다. 바로 EDAR이라는 유전자로 동아시아인 대다수는 이 유전자의 변이체를 갖고 있다. EDAR 유전자는 엑토디스플라신 A 수용체 단백질을 만드는데, 동아시아인의 경우 이 단백질의 370번째 아미노산이 발린(V)에서 알라닌(A)으로 바뀐 변이형(370A)이다. 이 수용체 단백질은 태아발생시 외배엽의 발달에 관여하는 신호전달 경로에 있으면서 피부, 머리카락, 손톱, 이, 땀샘 등의 발달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아시아인 대다수가 지니고 있는 변이형은 신호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한다. 그 결과 머리카락이 더 굵고 앞니가 삽처럼 생기게 됐다는 것. 그러나 이런 상관관계에도 불구하고 과연 EDAR 유전자의 변이가 이런 특성의 변화의 진짜 원인인가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못했다.

그런데 지난 14일 저명한 생물학저널 ‘셀’(Cell)에 EDAR 유전자 변이가 이런 표현형의 변화를 일으킨다는 것을 동물실험을 통해 확인한 재미있는 논문이 실렸다. 미국 하버드대 의대 연구진을 비롯한 미국, 중국, 영국 공동 연구팀은 쥐에게도 동아시아인처럼 EDAR 유전자에 변이가 생기게 만든 뒤 어떻게 되는지 관찰했다. 그 결과 사람에서와 비슷하게 변이형(370A)인 쥐는 표준형(370V)인 쥐에 비해 털이 더 굵었다. 한편 이빨의 경우는 쥐의 이빨과 사람의 이는 워낙 구조가 달라서인지 별 영향을 주지 못했다.

쥐에서 변이의 진짜 이유 찾아

▲ 쥐의 젖샘 지방조직의 현미경 사진. 위는 유전자 둘 다 표준형 유전자(370V)인 경우이고, 가운데는 부모로부터 하나씩 받은 경우(370V/370A), 아래는 둘 다 변이형(370A)이다. 아래로 갈수록 크기가 작아짐을 알 수 있다. 이는 동아시아 여성의 가슴이 작은 게 변이형 유전자 때문임을 시사하는 결과다. ⓒCell


표준형 쥐와 변이형 쥐를 비교하던 연구자들은 또 다른 차이점들을 발견했다. 즉 변이형 쥐는 땀샘이 더 많았고 젖샘의 지방조직이 작아졌다. 연구자들은 이런 예상치 못한 차이점이 사람(중국인)에서도 존재하는지 확인해 봤다. 그 결과 정말 370A 형인 사람들은 땀샘이 더 많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한편 변이형 쥐의 젖샘 지방조직이 작은 건 동아시아 여성의 가슴이 작은 것과 일맥상통하는 특징이다. 즉 동아시아 여인의 작은 가슴도 EDAR 유전자 변이의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다.

연구자들은 중국인을 대상으로 한 게놈분석 결과 EDAR 유전자에 변이가 생긴 건 약 3만5000년 전 중국지역에서였다고 한다. 즉 이때 이런 변이를 지닌 사람이 생존에 더 유리했고 더 많은 자손을 나아 오늘날 동아시인들 대다수가 370A형을 지니게 됐다는 것.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환경이 이런 변이를 선택했을까.

▲ 사람 피부 표면의 땀샘 분포 사진. 왼쪽은 부모로부터 하나씩 받은 경우(370V/370A)이고 오른쪽은 모두 변이형을 받은 경우(370A)다. 오른쪽이 단위면적당 땀샘 수가 더 많음을 알 수 있다. ⓒCell


연구자들이 고(古)기후를 알아본 결과 당시 중국지역은 굉장히 덥고 습했다고 한다. 우리도 매년 여름 경험해서 잘 알듯이 비슷한 온도라도 습도가 높으면 견디기가 더 어렵다. 온도가 올라가면 피부로 땀이 나와 증발하면서 열을 가져가(기화열) 몸이 식는데, 습도가 높으면 땀이 잘 증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EDAR 유전자 변이로 땀샘이 더 많게 된 사람은 몸을 식히는 효율이 좀 더 나았고 그 결과 생존에 유리했다는 것. 결국 동아시아인에서 EDAR 유전자 변이가 선택된 건 머리카락이 굵어지게 하고 앞니 모양이 삽처럼 바뀌게 해서가 아니라 땀샘이 더 많아지게 했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다른 변화들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 부분은 아직 불확실하다. 어떤 유전자에 변이가 생길 때 한 가지 특성만 바뀌는 게 아니라 여러 특성이 같이 바뀌는 현상을 ‘다면발현(pleiotropy)’이라고 부르는데, 이 경우 기후변화에 대한 적응으로 땀샘이 많아지는 표현형이 나오는 유전자 변이가 자연선택됐고 그 밖의 특징, 즉 머리카락 두께나 가슴 크기, 이 모양 변화는 다면발현의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

연구자들은 이번 연구가 인간의 유전자 변이를 실험동물에 적용해 그 영향을 분석한 최초의 시도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인간게놈 해독 이후 지역별, 인종별로 게놈 분석이 방대하게 이뤄지면서 이들의 특징을 갖게 해준 유전자 변이가 속속 밝혀지고 있다. 여기에 이런 새로운 기법까지 개발되면서 우리의 DNA에 새겨진 인류의 험난했던 생존 여정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앞으로 또 어떤 놀라운 사실들이 밝혀질 지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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