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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숨은참조'/말한다

[말한다] 미래를 여는 예술문 ② 나의 신념이 누군가의 열정에 찬물을 끼얹는다

by 서울청년예술인회의 2021. 7. 28.

나의 신념이 누군가의 열정에 찬물을 끼얹는다

 

박선영

 

‘미래를 여는 예술문’팀에 소속되어 예술 노동에 대한 회의를 시작한 지 어느덧 3개월이 되어간다. 이 스터디를 통해서 서로의 의견을 공유하고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동료를 만날 수 있어 늘 설레고 행복하다. 내 본업 때문에 부득이하게도 결석을 몇 번 했지만, 그 시간들을 통해서 예술 노동에 대한 내 신념과 열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처음 예술 노동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공부를 시작했을 때, 동료들은 ‘요즘 현장의 분위기가 많이 좋아졌다’라는 이야기를 나에게 꼭 들려주었다. 곧이어 2019년에 개봉한 영화 기생충이 표준 근로계약서 내용을 다 지켰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그런 분위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그러나 현장에서 내가 체감하는 변화는 거의 없었다. 그 해, 내가 논문을 준비하면서 했던 배우들과의 인터뷰도 개선되었다는 현장과는 먼 이야기로 느껴지게 했다.

나는 5월에 서울의 한 대학원의 장편영화에 조연으로 참여했다. 배우로서 연기와 역할에 대한 소정의 목표를 갖고 출연하였으나, 다시 한번 예술 노동에 대한 나의 신념과 어긋나는 현장을 마주하게 되었다. 물론 이 영화가 대학원에 만든 학생영화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학교 작업에서부터 예술 노동에 대한 교육이 시작되어야 하며, 현장에 나가기 위한 전 단계이기 때문에 서로의 역할을 존중하고, 현장과 가까운 전문성을 지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감독을 제외한 스태프들은 한국어가 능숙하지 않은 중국인 학생들이었고, 외부에서 섭외한 음향감독만이 유일한 한국인이었다. 배우들과 스태프들과의 의사소통이 어려워 통역이 필요할 정도였다. 더 나아가 학점을 채우는 것이 목적인 중국인 스태프들은 기말고사 기간이 되자 현장에 나오지 않았다. 결국, 감독과 음향감독 두 명이 현장을 진행하게 되어 출연하는 배우들이 스태프를 맡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촬영이 없던 어느 날, 감독은 배우들에게 이 상황을 설명하며 배우들이 스태프가 되어주기를 설득했다. 배우들은 스태프 일을 겸하기로 감독과 협의했다. 이 때문에 나는 그 상황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한 채 촬영을 하러 나갔다.

스태프 일을 하고 있던 배우들이 나에게 다양한 지시를 내리며, 내가 스태프로 참여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불쾌함을 드러냈다. 그들이 표출하는 부정적 감정 때문에 나는 원인 모를 죄책감을 느꼈다. 그리고 심하게 분주한 현장과 스태프 일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나는 연기에 전혀 집중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배우로서 역할을 위해 준비할 것들이 많았다. 또한, 장소 대여시간 문제로 촬영 일정이 있는 날마다 밤을 새워 아침까지 촬영해야 했다. 반면에 나의 체력은 이미 고갈상태여서 밤을 새울 수가 없었다. 이런 부분에 대해 감독에게 사전에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계속 나에게 밤을 새워야 한다고 강요했다. 스태프가 배우로 바뀌면서 사전에 나와 상의한 내용과 달라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여주인공 배우가 조연출이 되면서 연기 디렉션부터 촬영 스케줄, 카메라 앵글까지 진두지휘하는 상황이었다.)

나는 2주일 동안 참아왔던 분노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감독과 대화를 시도했으나 그는 내가 배우 일만 하고 스태프일을 하고 있는 다른 배우들을 도와주지 않는 것에 대한 불만을 드러냈다. 대화를 통한 해결이 어려워지자 나는 하차를 선언하였다.

그러자 갑자기 배우들이 나에게 달려들면서 폭력적으로 소리를 지르며 화를 냈다. 나도 참지 않았다. 어떻게 그런 용기가 났는지 알 수 없지만, 그동안 드러내지 않았던 ‘예술 노동에 대한 신념’과 ‘배우로서의 직업의식’에 대해 설명했다. 나는 감독에게 ‘이곳은 배우예술을 펼치기 어려운 현장이며 나의 신념에 어긋나는 현장’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나의 갑작스러운 하차 선언 때문에 감독은 사과하며 무릎까지 꿇으려고 했다. 그런 행동이 모순적으로 느껴졌다. 나는 감독에게 또다시 현장에서의 배우의 작업에 관해 설명했다. 배우가 대본을 받고, 촬영현장에 오기 전까지, 역할에 대해 머리부터 발끝까지 생각하고 준비하고 온다고 말해주었다. 일상에서도 수십 번 생각하고 그것을 구현해내기 위해 준비를 한다는 말과 만약 감독이 스태프 겸 배우를 찾는 것이었다면, 촬영 전 그런 부분이 미리 공지가 되어야 했으며, 오디션으로 배우를 선발하는 것도 아주 위험한 행동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배우의 작업을 이해해주고, 더 나아가 역량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예술의 현장이며, 글에 써진 인물을 나를 통해 온전히 만들어내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고 말해주었다. 감독은 연신 사과했지만, 그것이 진심인지는 알 수 없었다. (진심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것이 이 글을 쓰는 오늘까지 배우들이 계속 스태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장에 있는 대부분에 배우가 경험이 없는 신인이기 때문에 나는 용기를 내어 말할 수밖에 없었다. 현장 경험이 적고, 작업이 절실한 어린 배우들에게 꿈에 대한 열정을 이용하고, 강요하며 이것이 마치 예술의 현장인 듯 말하는 감독의 말과 행동이 나의 양심을 자극했다. 내 또래의 경력이 있는 남자배우도 있었지만, 정작 그는 이 상황을 회피하고 방관하였다.

나는 그들에게 이 영화가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다. 기회는 늘 적고, 경쟁은 치열하다. 심지어 코로나로 인해 일은 줄어들었다. 많은 예술가에게 매서운 겨울 같은 혹독한 시기이다. 이 영화의 완성을 간절히 원하는 그들의 열정에 찬물을 끼얹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 그렇게 하고 말았다. 그들 역시 밤을 새워가며 스태프와 배우를 병행하는 일이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감독에게 모든 배우의 표준계약서 작성에 대한 확답을 받고, 계속 촬영에 임하여 나의 분량을 끝냈다.

나의 작은 투쟁 후에 몇몇 배우들이 나에게 조용히 다가와 그런 말을 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그들은 촬영 내내 자신들도 말하고 싶은 부분이었지만, 용기가 없어 말하지 못했었다고 했다. 나는 그들에게 자신이 하고 있는 배우에 대한 자긍심과 직업의식을 가져달라는 당부를 했다. 앞으로 이런 현장이 없을 것이라는 장담을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감독은 나를 빨리 현장에서 보내고 싶었는지 고맙게도 나의 촬영 스케줄을 앞당겨 주었다. 그 덕분에 나머지 분량을 촬영하고 새벽 2시쯤 귀가할 수 있었다. 나의 신념이 누군가의 열정에 찬물을 끼얹었다. 찬물을 끼얹은 대가인지 그 날 밤부터는 나는 감기에 걸려 3일 동안 고생했다.

나는 이 일을 계기로 ‘표준계약서’라는 법적인 가이드 또한 중요하지만, 예술가 스스로 노동자임을 인식하는 단계가 첫 번째로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예술가가 자신의 창작행위를 전문적으로 해내고자 할 때’라는 필수조건을 수반한다.

예술가의 창작 활동이 노동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쟁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우리 사회는 예술가라는 직업에 대하여 ‘하고 싶은 일을 한다’, ‘자유롭다’, ‘가난하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당연히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라는 막연한 인식들이 아직도 자리 잡고 있다. 이는 사회가 ‘예술가를 직업적 사회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예술가 또한 스스로를 자신을 창조적인 노동자라고 인식하는 것에 대해 인색한 경향이 있다.

예술 노동이란 창작과 노동이 결합된 개념이며, 배우의 노동 또한 이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시스템적인 환경이 개선될지라도 배우가 자신의 창의적인 노동에 대한 인식이 없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렇게 예술가의 노동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환경에서 국내 대학은 매년 수천 명의 예술 학도를 배출한다. 졸업을 앞둔 신진예술가들에게 필요한 강의는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된다. 현장 경험이 적은 신진예술가들에게 예술가는 하나의 직업이며, 그들이 현장에서 한 명의 노동자라는 것에 대한 현실적인 조언이 필요하다. 막연한 환상을 심어주기보다는 사회 진출 전에 필요하고 준비해야 할 것들을 알려주어야 한다. 특히 노동자로서의 인식이 중요하다. 배우를 예로 들자면, 무대와 카메라 앞에 서기 전에 역할을 받아 실연자로서 연기를 준비하는 과정, 즉 대사를 암기하고 역할창조를 하고 그것을 연습하는 모든 과정을 노동으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노동자로서의 인식은 현재 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많은 문제를 풀 수 있는 해결점이다. 예술가는 자신의 노동에 대해 충분한 보상을 받아야 하며 노동자로서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는 인식을 가질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문화관광체육부에서 제정한 표준계약서 작성 방법과 더불어, 작업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사고와 대처방법 등 예술인들의 권리를 보호해줄 수 있는 제도나 계약에 대한 주기적인 교육이 필요하다.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의 가입 기준과 방법, 예술인 보험제도, 실업급여 등의 교육을 통해서 예술가가 작품을 지속하며 성장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이것이 가져올 변화는 앞으로 문화예술 산업에서 종사하는 모든 예술가가 자신에 노동에 걸맞은 보상을 받으며 표준계약서 안에서 보호받는 노동자로서 건강하게 일할 수 있게 할 것이다.

또한, 예술가의 인식뿐 아니라 정부의 노력도 중요하다. 2013년 제정된 표준계약서 내용을 수정·보완 및 강화하고, 갑과 을로서의 계약이 아닌 예술가들의 작업과 상황에 맞게, 더 나아가 예술가의 저작권까지 직접 계약을 체결할 수 있는 사회적인 인식과 예술 노동에 대한 넓은 이해가 필요하다.

나에게 예술가로서의 지나친 특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를 표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말한다. 나는 공짜로 돈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가로서 내가 일한 만큼 요구하고 있다. 나는 내가 일한 시간만큼의 성과를 내고 성장하고 싶다. 나는 공정한 기회와 과정을 통해 예술 노동을 하며, 한 명의 직업인으로 살아가려 한다. 그것은 예술가라는 직업을 선택했다고 해서 누리지 못할 일은 전혀 아니다. 그래서 ’미래를 여는 예술문‘을 통해 내 미래를 활짝 열어 보고 있다.

 

필자소개

박선영2007년 연극으로 배우로 데뷔하여 활동 중이다. 2018년에는 길고양이를 돌보며 제로웨이스트와 비건에 대해 관심 갖게 되었다. 주요대표작은 데뷔 15년 만에 주연을 맡은 영화 <어서오시게스트하우스>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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