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바로가기

다이내믹 부산 전체기사보기

[쿨부산 스토리텔링 공모전 가작] 선택

내용

익숙하고 낯선 감정은 어느 시공간 안에 있던 동시에 찾아온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 날은 떠날 때와 같은 달이었지만, 그때보다 바람이 차가웠다. 부산역 역사를 나가자 떠나기 전과 완전히 바뀐 광장이 눈에 들어왔다. 새롭게 단장된 정류소에서 노선이 아직 운행되고 있는지 확인했다. 차를 기다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움직이는 것과 솟아오른 것은 모두 변해 있는데, 태양과 하늘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내부가 변한 버스의 맨 뒷좌석에 앉아 MP3를 꺼냈다. 랜덤 재생을 눌렀더니 중학교 때 즐겨 부르던 김광석의 노래가 흘러 나왔다. 한층 더 화려해지고 복잡해진 시가지에서는 익숙하던 많은 것들이 새로움에 자리를 내줬다. 오래전과 흐름은 같지만, 무게도 색깔도 다른 세월이 흘러가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린 후, 가파른 언덕을 올랐다. 새롭게 포장되긴 했지만, 집으로 올라가는 길이란 건 변함없었다. 그 대신 그때보다 숨이 가빠졌다. 잠시 멈춰 호흡을 고르며 생경한 곳에 첫 발을 들인 여행객이나 이방인처럼 뒤를 돌아봤다. 아파트, 아파트, 마트, 병원, 아파트. 저곳에 고등학교로 가는 지름길이 있었는데, 저곳은 대포집이 있던 곳인데, 저곳에는 뭐가 있었더라, 저곳에 있던 카페에서 그녀와 처음 데이트를 했었는데. 손끝으로 차갑고 매끈하거나 거칠고 날카로운 표면을 쓰다듬으며 골목길을 따라 걸었다. 붉은 벽돌 사이 군데군데 방수제를 덧칠한 다세대주택 입구에 서서 지나쳐온 골목으로 시선을 돌렸다. 흘러간 시간이 웅덩이처럼 고여 있었다. 떠나기 전에는 이 좁은 곳을 벗어나, 마음껏 헤엄칠 수 있는 바다까지 흘러가고 싶었다. 집을 떠난 후, 넓고 푸른 대양을 만났다. 하지만 나는 부레와 지느러미를 가진 어류가 아니었다. 파도에 편승해 부유하는 해조류였을 뿐.

402호의 문 앞에서 오랫동안 사용한 적이 없었던 열쇠고리를 꺼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텅 빈 집을 울렸다. 욕실 문을 열자 오이 샴푸냄새가 향긋하게 피어올랐다. 어머니는 아직 이걸 쓰고 계셨구나. 늦둥이 여동생이 내 방을 자신의 창고처럼 쓰고 있다던 어머니의 말과 다르게 방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유격이 생긴 창 틈 사이로 바람소리가 새어들었다. 바닥에 앉았다가 다시 옆으로 몸을 뉘었다. 시간의 밀도는 텅 비고, 공간의 밀도는 가득 찬 방안에서 어제와 내일이 순식간에 흘러갔다. 이곳을 떠나기 전에도, 혼자 지낼 때도, 오늘도, 현실은 항상 공허하면서도 충만한 얼굴을 들이밀었다.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안녕하신교, 날씨 좋지예?

동이 틀 무렵, 산에 올라 돌탑 옆에 앉아있는데 노년의 등산객이 말을 건넸다. 웃으면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힘찬 걸음으로 산길을 따라 오르는 그를 보면서, 나도 붉어오는 하늘을 향해 걸었다.

내리 온지 며칠 됐다꼬? 그냥 며칠 더 푹 쉬그라.

고용센터에 가보겠다고 말하자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창을 등진 어머니의 얼굴에 주름이 빼곡했다. 내가 새겨놓은 흔적이라는 죄책감에 눈을 깔며 멋쩍게 웃었다. 여동생이 신발을 신다말고 뭔가를 건넸다. 손을 내밀었더니 막대사탕 두 개를 쥐어줬다.

오빠야 귀향 선물. 선심 좀 썼으니까, 애끼 묵으라, 히히. 엄마, 학교 댕기오께요.

동생과 같이 나가자 아버지가 트럭에 시동을 걸고 기다리고 계셨다.

니도 어데 가나? 타라.

트럭에서 내린 후, 지하철역으로 걸어가면서 담배를 꺼내려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는데 사탕이 잡혔다. 알록달록한 포장을 벗겨 입에 넣었다. 동생이 좋아하는 딸기 맛이었다.

여기 경력 사항하고 특기 사항도 채우시구요.

고용센터 상담원의 말에 잠시 머뭇거렸다. 낙방한 고시생에게 책 읽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것도 내세울만한 경력도 없었다.

센터를 나와 핸드폰 폴더를 열고 친구들의 연락처를 찾았다. 몇 년 동안이나 먼저 연락을 한 적이 없었기에 잠시 망설이다가 한 친구의 번호를 눌렀다.

어, 니 살아있었나? 어데고? 에? 내리왔나?

이 써글놈이 고향땅 밟았으믄 행님한테 신속하게 연락을 해야지!

야, 저녁에 그 귀하신 상판떼기 함 보자.

아빠가 된 친구도, 일이 바쁜 친구도 너나없이 밝은 목소리로 저녁에 보자고 했다.

서면역을 나와 이어폰을 꼈다. 가사 없는 곡조에 맞춰 시간의 직선 위를 한참동안 부유했다. 화려한 조명들이 하나둘씩 켜질 무렵, 서점에 들렀다. 지식의 무게와 관계의 넓이 사이를 유령처럼 헤매다가 행정법 관련 도서가 가득한 책장 앞에 멈췄다. 익숙하고 비슷한 제목들을 마음속으로 읽다 한 권을 뽑아 생각 없이 빠르게 넘겼다. 의미를 잃은 글자가 스쳐가면서 인쇄된 종이의 냄새가 피어올랐다.

친구들과의 약속 장소로 가는데, 발바닥에 전단지가 채였다. 실업자 요리교육. 허리를 굽혀 자격증, 취업, 창업이라는 말이 적혀있는 전단을 바라봤다. 종이를 흔들어 털고, 몇 번을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세 놈은 일찍 갔고, 인자 넷이 남았네. 좋다.

그라믄, 우리 만년고시생 귀향 기념으로, 오늘 3차는, 이 몸이 쌈박하게 쏘께! 오케이?

우후~ 김부장님 나이쓰~

임마, 이번에 진급하드만 제수씨 몰래 쫌 꿍치둣는가베.

그라믄 어데 갈래? 오늘 주인공이 정해바라.

한 녀석의 선언에 추억 속에서 깨어난 친구들이 불콰해진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 잠시 뜸을 들이다 해운대나 광안리라고 대답했다.

야, 그 동네는 비싸서 전마 깜냥으로 수습이 안 된다. 내가 싸고 좋은데 아는데.

친구들이 아가씨 나오는 술집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기에, 조용히 만류하면서 바다를 보고 싶다고 했다. 모래를 밟은 지도, 파도소리를 들은 지도 오래됐다.

그라믄 이제 완전히 접은 기가? 더 안 해보고?

모래사장에 함께 앉아있던 녀석이 캔맥주를 건네며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하며 바다 쪽을 바라봤다. 보름달빛 아래서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고등학교 시절처럼 깔깔거리고 있는 친구들의 운동화는 구두로, 교복은 정장으로 바뀌었지만, 녀석들의 목소리와 표정은 하나도 변한 게 없었다. 안 들어올 거냐는 한 친구의 외침에 우리는 맥주를 깨끗이 비우고, 봉지에 넣은 다음, 신발을 벗었다. 까끄름하고 촉촉한 알갱이가 부드럽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곳의 달은 항상 옅고 희미했는데, 이곳의 달은 짙고 선명한 듯 보였다. 나는 여전히 멀기도 하고 가깝기도 한 바다를 향해 발을 뻗었다.

직업학교 과정을 끝내고 강사님의 추천으로 제법 큰 식당에 취직했다. 주방보조로 들어갔기에 월급도 적고 익숙하지 않아 몸이 힘들긴 했지만 식당 사장님도 좋았고, 직원끼리도 화목했다. 점점 일에 적응이 되자 바쁘게 몸을 움직이는 게 즐거워졌다. 가끔씩 함께 고시를 준비하던 친구들의 전화가 오면, 자신 있게 요리를 배우고 있다고 말했다. 의외라는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웃었다. 익숙한 어제가 낯선 오늘이 되고 익숙한 오늘이 낯선 내일로 변하는 게 삶이었다.

모처럼 시간이 나서 친구 두 명과 술을 마셨다. 불콰해진 얼굴로 웃던 녀석이 그녀의 이야기를 꺼냈다. 나와 헤어진 후로도 친구들과 가끔씩 연락을 하는 모양이었다.

니, 다시 한 번 만나볼 생각 없나?

친구의 말에 나는 웃으며 술잔을 비웠다.

그녀는 항상 먼저 손을 뻗어줬고, 나는 그 손을 잡기만 하다가 끝내 놓아버리고 말았다. 2차에서 두 번째 떨어졌을 때, 그녀에게 전화해 이별을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몇 주 후, 그녀는 나를 찾아 올라왔었다. 고시촌 근처의 공원에서 우리는 아무런 말없이 앉아있었다. 한참 동안 그렇게 있다가 그녀가 내게 말했다.

오빠, 나한테 하고 싶은 말 없어요?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날 나는 그녀와의 추억과 미래를 나만의 현실과 자격지심으로 맞바꿨다. 그것이 그녀와 나의 마지막이었고, 우리의 끝이었다.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새로 산 스마트폰을 켜고 주소록을 쓸어 올렸다. 예전 전화번호를 옮길 때 그녀의 번호를 옮겼던가? 이름 대신 '연락하지마'라고 적혀있는 란에 네 자리의 번호가 보였다. 그녀의 생일이었다. 나도 모르게 화면을 터치해 번호를 찍었다. 몇 년이나 누르지 않았던 번호임에도 불구하고, 손가락이 기억하고 있었다. 통화 아이콘을 바라보며 몇 번이나 망설이다 전원을 껐다. 이제는 낯설 때도 되었는데 여전히 익숙한 것들 때문에 머리가 아팠다.

사장님의 오래된 지인이 병환으로 돌아가셨다. 사장님은 고아였던 자신을 물심양면 도와줬던 사람이라며 이런 시기에 돈을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고 사흘 동안 가게 문을 닫았다. 바쁘던 일상 속에서 갑작스레 여유가 생기자 피로가 몰려왔다. 잠에서 깼더니 오후 다섯 시였다. 혼자 밥을 챙겨먹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목적 없이 한참 인터넷을 뒤지다가 영화를 본 지 오래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롯데 시네마에서 예전에 좋아했던 감독의 신작이 상영되고 있었다. 설거지를 하고 모자를 눌러쓴 후, 스마트폰과 지갑을 챙겨 문을 나섰다.

커플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다다랐을 때, 첨단의 입을 빌린 추억의 속삭임이 게 멎었다. 다음 노래로 넘어가기 전 승강기의 도착음이 울렸다. 몸을 앞으로 향하는데 차가움이 맞닿은 틈 사이로 귀에 익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서서히 문이 열리자 즐겁게 웃고 있는 그녀가 보였다. 그녀는 예전과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너무 반가워서 이름을 부를 뻔 했지만 곧 고개를 숙이며 모자를 눌러썼다. 그녀는 누군가와 팔짱을 낀 채 웃고 있었다. 빨라지는 심장소리를 잠재우듯 눈을 꼭 감았다. 엘리베이터가 다시 땡하고 울렸을 때, 비로소 고개를 들었다. 밖으로 나와 두리번거리다 지하도를 건너 정류장으로 뛰어갔다.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 속에서 그녀의 얼굴을 찾았지만, 그곳엔 없었다. 잠시 그대로 서서 담배를 끊었다는 사실도 잊어버린 채 주머니를 뒤졌다. 24시 편의점에 들려, 담배와 라이터를 샀다. 근처의 벤치에 앉아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기침을 두 번 뱉었지만, 곧 연기와 함께 지난 인연이 머릿속으로 스며들었다.

며칠을 망설이다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가 즐겨 부르던 노래가 흘러나왔다. 아직 음악을 바꾸지 않았다는데서 묘한 기대감과 후회가 한꺼번에 밀려들어왔다. 같은 구절이 몇 번이나 반복되는 동안 오래된 기억이 차올랐다. 그녀의 이름을 마음속에서 되뇌며 고개를 숙였다. 전화를 끊으려는데 음악이 멎었다. 수화기 건너편에서 낮고 조용한 그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멈춘 것 같은 시간 속에서 가슴속에 묶어두었던 그녀의 이름을 조용히 불렀다.

기억은 항상 따스하지만, 풍경은 매번 차갑게 변한다. 표식은 어디서나 친숙하지만, 의미는 어디서도 동일하지 않다. 액자 속에 담긴 과거와 창밖을 스쳐가는 현재, 반복되는 일상과 예상치 못한 사건, 그 모든 것이 '나'라는 존재가 이 세상의 일부가 되는 과정이다. 우리는 익숙하게 만들거나 낯설게 해야 하는 선택의 기로 위에서 살아간다.

작성자
이한(부산시 가야동)
작성일자
2012-10-31
자료출처
부산이라좋다
제호

부산이라좋다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이전글 다음글

페이지만족도

페이지만족도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만족하십니까?

평균 : 0참여 : 0

댓글은 자유로운 의견 공유를 위한 장이므로 부산시에 대한 신고, 제안, 건의 등 답변이나 개선이 필요한 사항에 대해서는 부산민원 120 - 민원신청 을 이용해 주시고, 내용 입력시 주민등록번호, 연락처 등 개인정보가 노출되지 않도록 주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상업광고, 저속한 표현, 정치적 내용, 개인정보 노출 등은 별도의 통보없이 삭제될 수 있습니다. 부산민원 120 바로가기